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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36] 순례 32일째, 피니스테레를 향해서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36] 순례 32일째, 피니스테레를 향해서

Yildiz 2011. 12. 21. 01:24



2008년 6월 24일 화요일

어제 밤 늦게 자서 일찍 일어나기 힘들 줄 알았는데 깨어나보니 아침 7시. 생각보다 이른 아침부터 비어 있는 침대가 많다. 이 사람들, 모두 피니스테레로 떠난 걸까?

마르코스가 자는 방을 지나기 전에 로빈이 있는 방을 먼저 찾았다.
로빈은 깊게 잠이 든 것 같다. 깨워서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갈까 하다가, 뒷모습에 인사만 건네고는 마르코스가 있는 방으로 왔다.

세상에. 한 줄로 나열된 침대 중 맨 마지막 침대에 마르코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있어서 분명 잠을 잘 못 잤을 것이다. 조심히 지나치려고 했는데, 마침 마르코스가 깨어있어서 내게 인사를 한다.

이렇게 금방 헤어져야한다니. 아쉽지만 각자의 길이 다르니 이만 인사를 할 수 밖에 없다.

어제 죨드가 까미노 방향을 알려준 덕분에 헤매지 않고 산티아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대성당 광장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걷다가 공원이 나오자 공원길을 따라 쭈욱 걷는다.


이후 산길에 들어섰는데 벌목을 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지는 몰라도 길위의 상태가 좋지 않다.

앞서 가는 이, 뒤따라오는 이가 없는 길을 걷는 것.
조금은 무섭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산길을 지나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까지 걷는 것을 끝으로 하고 피니스테레에 가고 싶을 땐 주로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온다. 그래서 길 위에서 순례자를 만나는 게 드물어 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부터 꼭 피니스테레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수호천사가 속삭이는 듯한 울림을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어떤 간절한 울림이었다.

혹시 내가 길 위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또 이번 길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까 궁금해하며 걷는다.





평소의 까미노의 길보다 사람들이 적고 조용하다. 그래서 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보다 더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큼지막하게 새겨진 까미노 표지를 만나니 참 반갑다.



아침부터 계속 혼자 걷는 까미노. 어제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다. 성당에 가서 홀로 절대고독을 느끼며 운 것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친구들을 만나고, 또 파울로 코엘료와의 만남까지.

생장에서 첫 날. 출발하기 늦었음에도 반드시 피레네 산맥을 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면, 그 다음날 라라소냐에서 마르코스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루에 겨우 9km 걸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모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산티아고에 더 일찍 도착하게 되서 마르코스를 못 만나고 미리 피니스테레로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동안 까미노의 여정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을 떠올리면서, 결국 어제와 같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했다는게 참 신기하다.

어제의 일들을 위해, 나는 그렇게 까미노를 열심히 걸어왔던 걸까.

정말.. 감사하다.

내가 이 길 위에서 얻은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안다는 것에.



첫번째 마을에 바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화장실도 가고 꼴라까오(코코아)를 시켜서 잠시 쉰다. 
이제 좀 걸어볼까 싶어서 자리를 뜨려는데, 정은언니가 바에 왔다. 알베르게에 가면 언니를 다시 볼 수 있겠지. 후의 만남을 기약하며 일찍 나왔다.



그런데 괜히 일찍 나왔나. 정은언니와 같이 걸을 걸 그랬나?

아무리 걸어도 이야기 나눌 사람 한 명도 찾질 못했다.
혼자 걷는 한적한 길.




산티아고가 마지막이 아니었는데, 자꾸 산티아고가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피니스테레. 굳이 해석하자면, 대륙의 끝.
까미노가 인생의 길을 상징한다면 마지막 지점은 '죽음'에 해당하겠지...

영화 '라비앙 로즈'에서 에디트 삐아프가 죽는 장면이 생각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장면...

까미노에 오기 전에 읽었던 책에서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읽긴 했지만
아직은 제대로 실감나지 않는 '죽음'. 

 이 생각 저생각 별 생각이 다 들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은 뜬구름처럼 퍼진다.



시원한 물소리가 멀리서부터 먼저 나를 반기더니 마을의 입구에 닿는 오래된 다리를 보곤 감탄한다. 
까미노에서 오래된 건축물을 자주 보게 되서 그런지 눈만 높아진 것 같다. 이젠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는 뭔가 심심해보이지 않을까.



이 물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이 마을의 다리는 푸엔테 데 레이나Puente de Reina의 다리나 오스피딸 데 오브리고Hospital de Obrigo의 다리처럼 길고 멋스럽진 않지만, 다리를 이루는 돌들이 지닌 흔적들에 무척 눈이 간다.




오늘의 목적지 네그레이라Negreira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것 같다. 정말 작은 마을일 것 같았는데.
도시 같은 분위기에 까미노 지표를 못 찾고 길을 잃어버릴까봐 잠시 걱정이 된다.



알베르게의 방향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 길에서 만난 아저씨께 물어보니, 설명하는데 어려워하신다. 

'여기서 쭉 가서 어디쪽으로 가세요.' 이렇게 간단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이렇게 설명하면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아저씨는 손짓으로도 열심히 설명해주신다. 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스페인어는 아니지만, 아저씨의 말을 끝까지 듣고보니 알베르게는 정말 여기서도 한참 더 가야 도착하는구나 싶다.

"쭈우우우욱 가서 다리를 건너고, 산 같은데로 올라가야해요."

방향을 정해야하는 중요한 키워드를 머릿속에 꼭꼭 입력한다. 외국인 순례자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답해주다니. Muchas Gracias! 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덕분에 확신에 찬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겠다.




한 30분정도 더 걸었을까. 주택가를 벗어나자, 이 마을의 끝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대로 걷고 있는 걸까, 걱정이 될 무렵 '다리' 같은 곳을 지나 아저씨가 말한 조그마한 '산'을 발견했다. 아까 길에서 만난 아저씨가 말해준 대로 산의 오르막길을 어느 정도 올라가니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알베르게. 길을 안 물어봤다면 찾아오기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좀 이따 먹을 걸 사러 나가야하는데, 마트까지 다녀오려면 걸어서 왕복 1시간... 이나 걸리겠구나.
귀찮으니 한번 나가면 나갈 생각을 말아야지. ㅎㅎ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이곳의 정원이 22명 밖에 안되서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까봐 걱정했었는데 야외에 텐트가 몇 개나 있다. 좀 더 느긋하게 와도 괜찮았겠구나. 리셉션으로 가니 이미 도착한 한국인 부부님이 나를 맞이해주신다. 오늘 알베르게 숙박 기록부를 보니, 이거 왠걸.

내가 5번째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니! 엄청 빨리 온 거네. 괜히 조마조마했다.
숙박비를 지불하고는 위층으로 올라가 내가 자고 싶은 침대 자리를 고른다.

야호! 오늘도 단층 침대에서 잔다.

안정적으로 잠잘 자리를 확보하고, 이젠 열심히 배를 채울 일만 남았다. 맛있는 게 엄청 먹고 싶어졌다.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마구 고르다보니 장바구니가 가득. 요거트 몇 개 사고, 빵에 발라먹는 크림도 샀다. 가스가 든 물 맛은 어떤지 궁금해서 하나 구입. 과일도 많이 샀다.

아까 과일가게에서 나를 본 어떤 순례자는 내게 버스 타고 왔냐고 물어본다.

버스?
왜 그런 질문을 했나 싶었는데, 덩치가 조그마한 애가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했으니, 걸어서 왔는지 버스 타고 왔는지 궁금했나보다.

잘 걷는 것에 대한 칭찬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무거운 짐을 알베르게까지 단숨에 들고 가는데 힘들어서 중간에 쉰다.
일기장을 가져왔어서 어제 마저 못 쓴 내용도 쓰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피니스테레에 가면 무엇을 태울까. 한국에 어떤 것을 우편으로 보낼까. 이제 본격적인 여행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을 떠나기 전에 빅토리오, 피아 부부를 찾아 뵙고 오스트리아에 가기 전에 노라에게 메일을 보내야지.
벌써부터 친구들이 그립다.

하루가 그럭저럭 흘러간 날.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런지.
오늘은 어제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조용한 날이다.
내게 남은 까미노의 길을 여과없이 받아들여야지.
내일은 30km 이상을 걸어야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침대까지 얻으려면, 서둘러야할 것 같다.

내일도 힘내서 화이팅!!



오늘의 지출
까페 2.80 + 숙소 3 + 슈퍼 10.89 + 과일 2.16 = 18.85유로

오늘의 스탬프!

 







Santiago de Compostela - Negreira 22km






전 날에 비해 정말 잔잔했던 날.
이야기를 축소할까 하다가, 원래 쓰던대로 그때 했던 생각들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개인적인 기록의 의미도 있고,
얼마 되지 않는 사진이지만 후에 피니스테레를 향해 걷게 될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피니스테레. 피스테레... 라고도 해서 지명 이름을 어떻게 써야할까 하다가
제가 편한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ㅅ =;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땅끝마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다를 향해서 걷는 마지막 여정.
의미있는 발걸음이었다죠.

무튼, 꾸준히 포스팅만 다음 여행기를 쓸 여력을 줄 것 같네요.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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