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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25] 순례 23일째, 후회하지 않을 선택하기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25] 순례 23일째, 후회하지 않을 선택하기

Yildiz 2011. 4. 7. 01:39


걷자, 내 마음이 닿는 곳까지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밤새 비가 내렸는지 땅이 촉촉이 젖어있는 아침.
구름은 저 멀리까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내 키보다 훌쩍 큰 장미나무.


길에서 로빈을 만났다.
로빈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폰페라다Ponferrada에 입성.
대도시인데도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폰페라다 - 인구 6만명의 대도시. 와인 '비에르소'가 생산된다.



템플기사단 성. 이른 아침이라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보지 못했다.


템플기사단 성 앞에 일찍 문을 연 가게가 있어서 로빈과 함께 들어왔다.
대개는 꼴라까오를 먹는 아침이지만,
진열대의 유리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너무도 먹음직스러워 보여
순간 혹! 했다.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이라니!
하지만 모처럼 사치를 부려본다.



로빈은 '초콜라떼 꼰 츄러스' 를 시켰다. 난 처음 들어보는 건데...


진한 초콜렛 음료에 츄러스를 찍어먹는 게, 초콜라떼 꼰 츄러스. 스페인어 Con(꼰)은 영어의 with 와 같다.


로빈의 권유로 하나 찍어 먹어보았다. 음~
나름 괜찮다! 나도 다음에 사먹어야지~


컵에 한 가득인 내 아이스크림. 로빈은 커피까지 시켰다.




#군과 합류하다

가게에서 나와서 뒤를 돌아보니, 군이 오고 있다.
멀리서 그녀에게 인사만 하고 등을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녀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렇게 로빈과 나, 군은 함께 걷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북적거릴 것 같은 도시인데 비가 오기도 했고, 사람들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썰렁하다. 
도시의 아침만 잠깐 맛보고 지나가야 한다는 게 정말 아쉽다. 




길 위에 차도 없고, 너무 조용해.




폰페라다를 어느 정도 벗어날 무렵, 
로빈은 먼저 가겠다며 우리에게 인사하고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폰페라다Ponferrada의 아스팔트길에서 벗어나 조용한 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험난한 코스를 끝으로, 오늘은 참 무난한 길을 걷는다.
아침부터 계속 흐린걸 보면, 오늘 하루 이렇게 싱숭생숭한 하늘을 계속 바라봐야 할 것 같다.


말을 타고 순례하는 이들이 지나간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지나쳤던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마을의 길모퉁이에 있는 바에 군과 함께 들어왔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단골 바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많다.

늘 그렇듯이 나는 꼴라까오를 마시고,
늘 그랬듯이 군은 커피를 마신다.

우유를 든 것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감기가 더 낫지 않겠냐고 군에게 말해보지만,
그녀의 대답은 항상 같다.

"Lee, 너도 알다시피 난 커피광이잖아." 


며칠 전, 라바날Rabanal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걸은 이후부터
군과 걷는 시간들이 자연스러워졌다.
라바날Rabanal까지 간 것은 서로 동의해서 한 일이지만,
이젠 어디까지 같이 가겠다는 말 없이도
그저 묵묵히 서로를 이끌어주며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군이 늘 나보다 앞서 걷지만,
우리는 각자의 까미노를 즐기면서
함께 걷고 있다.



#너는 어떤 길을 좋아하니?

"Lee, 너는 끝이 보이는 길이 좋니,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좋니?"
예를 들면, 목적지가 훤히 보이는 길도 있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있잖아.
어느 쪽이 더 좋아?"

한적한 길을 걷는 중에 군이 내게 묻는다.

"글쎄요..."

짧은 대답을 길게 늘어뜨린 채 곰곰이 생각해본다.
취업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닌데,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자못 심각해진다.

군의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길은,
지독히도 진흙탕 같이 찐득찐득했던 온타나스 가는 길이다.
길에 있는 진흙이 신발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
걸을 때마다 신발의 무게가 더해져만 가고.
앞으로 걷는 걸음을 무언가에 발목 잡힌 듯 걸음을 떼기 힘들었던 길.
나보다 훨씬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지나쳐가고
텅 비어버린 길에 홀로 서 있었던, 비 내리던 그날.

어서 끝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시선이 멈추는 그 길 끝에 힘겹게 닿았을 때
또다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을 맞이하며
한숨 내뱉기와 희망 품기를 여러 번 했었지.

또, 메세타!
너른 평지, 끝없이 펼쳐진 지루한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길 끝에 있는 마을을 발견했을 때
갑자기 치솟던 에너지란.


"'길' 이라는 의미에서 둘 다 비슷한 것 같아요.
끝이 분명 보이는 길도 결국 그 끝에 닿았을 땐,
결국 또 다른 끝을 향해 놓여있는 길을 발견하잖아요.
평지이든, 구불구불한 언덕길이든,
길은 길이니까요.
그래서 길 위에서의 여정은 조금 다를지라도
각각의 매력이 있으니 둘 다 좋긴 해요.

그렇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끝이 보이는 길은 이미 앞에 펼쳐져 있는 것들을 보고 가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땐,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
저 너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 하며 걸을 수 있으니까요.
멋진 걸 발견할 수도 있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구요."

이제까지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야 하는, 순례자의 길.
마지막 목적지가 있다는 것, 끝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슬퍼진다.
정말 산티아고까지 며칠 안 남았구나.

그러나
슬픔도 잠시.

이내
두 손을 모은다.

노란색 표지를 따라 걷고 걸어서 도착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길과
내 옆에 있는 사람,

평범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얼마나 특별한 지를 깨닫게 해준
특별한 길, 까미노의 존재와

그리고
내게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삶에게.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이 감사함에 어떻게 보답해야할까.


마음 가득 감사함을 품고
낮은 언덕위로 향하는 발걸음.
언덕 너머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고,
더불어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무수한 길들도 궁금해진다.

결국은 끝에 가 닿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잘 걸어가보자.




#군과 헤어지다

까까벨로스Cacabelos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군은 혼자 머물 곳을 찾는 다며 내게 말한다.
"밤새 기침을 해서 다른 순례자들을 방해하는 것 같아."

"전 잘 잤는데.."
잠들기 전에 군의 기침소리를 듣긴 했으나, 잠든 후에는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근데 저도 무척 피곤해요. 항상 푹 자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는 순례자들에게 방해받으니까요.
저도 혼자 쉴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어요. "

까미노 초반엔 새벽 5시, 6시에 일어나는 게 쉬웠는데,
지금은 그렇게 일찍 일어나는 게 힘이 든다.
매일 밤 조금이라도 더 깊게 자려고 애를 쓰지만
꿈에서도 걷지를 않나.
새벽에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의 기척에 잠이 깨니
잠을 잘 자는 것 같아도 그리 개운하지 않은 것 같다.   

까까벨로스 마을에 여러 숙박시설들 중, 군과 나는 외관이 깔끔한 호스텔에 들어왔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방을 살펴보고 리셉션으로 돌아온 군은,

"여기 괜찮은 곳 같아.
나는 여기서 머물려고.

넌?

잠을 더 자야하는 건지,
아니면 꼭 혼자 있어야하는 건지 잘 생각해봐."
라며 내게 묻는다.

나도 여기서 군과 함께 머무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군은 내게 다시 한 번 고민해보기를 권하고 있다.  

혼자서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하룻밤에 30유로라는 호스텔 숙박비는
순례자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열흘을 잘 수 있는 돈과 맞먹는다.

내가 사치를 부릴 만큼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편하자고 방에 혼자 있자니.
분명 후회하겠지...

...난 잠만 푹 자면 될 것 같다.

"군... 난 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알베르게로 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
Lee.
그동안 함께 걸어서 즐거웠고,
고마웠어."

군은 나와 포옹을 하려 했지만 짐짓 멈춰 섰다.
군이 왜 작별인사처럼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그녀를 다시 만날 거란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군, 푹 쉬고,
7시에 여기 앞에서 만나요.
함께 저녁 먹어요."


"그래, 만약 네가 여기에 머문다면."

"좀 이따 봐요!"

정말
군과 저녁을 먹을 거라 생각했다.




#더 걸어가자, 내 마음이 닿는 곳까지

하지만,
내 자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군이 나를 더 알았던 걸까.

까까벨로스Cacabelos의 끝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쉽사리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멈쳐섰다.

군과 함께 있을 때는 이 마을에서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군은 자신의 숙소에 남았고,
나는 지금 홀로 갈림길 위에 서 있다.

'어서 알베르게에 도착해 쉬어야만 하는 지친 순례자' 임을 자처했었는데
막상 목적지에 와 보니,
난 그다지지친 순례자아닌 것 같다.  

사실 아침부터 갈까 말까 고민하며 걸었던 알베르게가 하나 있다.
다음 마을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있는
아베 페닉스라는 알베르게에서
마녀의식을 한다는 정보 때문이다.

여기서 짐을 풀고 쉴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2시간 더 걸을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한다.


각각의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본다. 상상이라 해봤자 원인에 따른 결과이지만.

원하는 알베르게에 가기 위해서 7km정도 더 걷는다면,
오늘 하루 31km 정도 걸은 게 된다. 내 체력에 비해 무리한 일정이긴 하다.
요새 30km 넘게 걸은 날이 많아서 내가 지치긴 지친 것 같다.
그리고 만약 가게 된다면 마을에 6시 정도에 도착할텐데...
아베 페닉스 알베르게가 이미 만원일 수도 있다.

더이상 걷지 않고 이 마을에서 머문다면,
저녁에 군과 식사를 하겠고...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가지 않는 길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되지 않을까?
걷지 않았음에도 마음은 이미 이 마을을 떠나 마녀의식을 한다는
알베르게에 가 닿아있을지도 모른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 멀리 떠나 있다니.
거리의 간극과 존재의 부재에 대한 상상으로 머리가 조금 멍해진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걸 알면서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중에 이 순간을 곱씹으며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쉽게 오기 힘든 이 길. 순례자의 길을 제대로 완성하려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해야한다.


그래,
걷자.

내 마음이 닿는 곳까지.


알베르게 리셉션으로 들어가 크리덴시알에 스탬프만 받고 나오는데,
마침 알베르게에 도착한 빅토리오 부부가 나를 보더니
어디 가냐며 물으신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갈 거에요."

빅토리오 부부님의 배웅을 뒤로 하고
순례자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평범해보이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군에게 미안하다.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기다렸다가
혼자 저녁을 먹겠구나...

군에게 저녁식사 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까까벨로스를 떠나고 있다.
내가 계속 걸어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된다면, 군은 나를 이해해줄거라 믿는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 머물고자 한 사람들은 이미 그 곳에 도착했는지, 길 위에 순례자가 없다.
하지만 이내 독일인 순례자, 우베씨를 만났다.

혼자 걷기 적적했는데, 처음 만난 순례자라 의례적인 대화로 간간이 말을 건넨다.

그는 티비에서 까미노를 알게 되고, 무척이나 오고 싶었지만
일이며, 가족이며,
여러가지 상황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
지금 휴가를 내서 온 게 어디냐며
조금은 불만을 섞인 어조로 얘기한다.

길 위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을 '순례' 와 관련해서 의미를 붙일 정도로
까미노에 대한 광적인 열의를 보이는 우베씨.


독일에서 온 우베씨.



포도나무들. 이게 다 자라면 와인으로 만들어지려나?




하늘이 무거워보여, 비가 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도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하다

도대체 마을이 있긴 있을까? 의심을 하며 걸어온 길 끝에서,
마을 입구에서 훤히 보이는 우뚝 솟아있는 한 성당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산으로 둘러쌓인 곳에 이런 마을이 있다니!!

여기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Villafranca del Bierzo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때때로 '또 다른' 산티아고 라고 불리기도 한다. 산티아고 성당 북쪽 입구는 '용서의 문' 인데 산티아고까지 갈 수 없는 중세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경우와 똑같이 여기에서 사죄 의식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아래쪽에 알베르게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찾는 알베르게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그런데 카메라 렌즈를 줌을 해서 밖에 있는 순례자가 누군지 보니, 내가 예전에 만났던 독일 사람이다!
그는 군의 친구이기도 하다.

근데, 이름이 뭐더라?
정말 쉬운 이름이었는데...
여행자 수표 이름과 같았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ㅠㅠ
이름을 몰라 손만 흔들며 인사를 한다.

멀리서도 나를 알아볼런지.


나중에야 생각났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오, 뭔가 심상치 않다!


마을 초입구부터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범상치 않는 기운을 내뿜는다. 어떤 매력이 있는 마을인걸까?


산티아고 성당


아베 페닉스 알베르게는 본격적인 마을로 진입로 왼쪽에 있다.
우베씨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머물기 위해 갈림길에서 곧장 헤어졌다. 



혹시 자리가 있을까 싶어 들어가니, 다행히 만원은 아니다. 

"저기 혹시... 여기가 마녀의식 한다는 곳인가요?"
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참았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바구니에 한 가득 있는 체리를 보니 구미가 동해서... 한 움큼 집는다


침대를 맡으러 2층으로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가니 누군가 나를 부른다.



뒤돌아보니 로빈이다!
로빈은 내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물어본다.
나는 너만큼 체력이 좋은게 아니라며 말하려다
그냥 웃어보였다. 내가 여기까지 온게 어딘데.

초간단 스피드 샤워를 하고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성당에 가본다.
그리 화려한 장식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어두컴컴한 성당을 밝히는 촛불과 조그마한 창으로 비추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조명은 엄숙하다.
의미있는 곳으로 생각되어 초를 하나 놓고
짤막하게 기도를 한다.



'앞으로 남은 까미노, 그리고 나의 긴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도록 지켜봐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래요.'


성당 밖으로 나오니 저기 멀리 성당이 보인다. 내가 안 갈리가 없지!



오홋, 귀엽다~!




#미션! 성당 문이 닫기 전에 스탬프 받기!!!

마을의 중심으로 들어오니, 큰 성당이 한 두개가 아니다.
말그대로 입이 쩍 벌어진다. 산이 둘러쌓인 이 곳에 이런 마을이 있다니!

길가에 있는 성당을 우선 골라 들어가본다.
성당을 지키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7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럼 다른 성당들도 7시까지만 연다는 거네? 시간이 촉박하다.
30분밖에 안 남았다.

이 마을의 모든 성당을 제대로 보진 못하겠지만,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를 나왔는데,
너무 가벼운 차림이 내심 아쉬어서 다시 알베르게로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의 길이 오래된 거라 돌로 된데다가,
오르막 내리막 경사도 심하기 때문에 샌달로는 빠르게 이동할 수가 없으니
신발도 바꿔신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성당에서 받을 수 있는 스탬프를 모두 받아야지.

알베르게에 와서 크리덴시알을 챙기고, 샌들을 등산화로 바꿔 신고는 
처음 방문 했던 성당으로 다시 왔다.



크리덴시알에 스탬프를 받고, 자리를 잡고 앉아 우선 짧게 기도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눈에 한 가득 담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본 후
다음 성당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평지라면 건물들이 쉽게 눈에 안 보일텐데, 산 중간지점에 있는 성당들이 눈에 띄어서
눈대중으로 찾아가본다. 큼지막한 성당이 4~5개는 있는 것 같다.


건너편에도 성당이 보인다.



저긴 또 어디야?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



산 니콜라스 성당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기도 했고,
어떤 곳인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문한 성당이 대부분이지만
오랜 시간동안 이 마을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는 성당들.
그동안 다녀간 사람들의 무수한 소원과 기도가
성당 안에 부유하고 있을거란 생각에 내 먼지도 더해 주고 왔다.



처음 방문 했던 성당 앞으로 다시 오니 7시가 다 되었다. 이 아래에 있는 성당에는 못 들어가겠구나.
아쉽지만, 다음을 꼭 기약하고 싶다. 그때는 여기에 일찍 와서 느긋하게 성당을 둘러봐야지.





#마녀의식.. 하나, 안 하나?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로빈이
같이 저녁식사 하자고 해서 다시 메인 광장으로 향했다. 
토마토 스파게티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알베르게로 오는 길에
로빈에게 마녀의식에 대해 들은 게 있는지 물어본다.

"난 잘 모르겠어. 혹시 캐나다 여성 알아? 그녀가 스페인어를 잘해. 필요하면 그녀한테 통역 부탁해봐. "



캐나다 여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에, 혼자 리셉션에 정황을 살피러 내려왔다.

사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알베르게에서 저녁 식사를 해준다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로빈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
그새 알베르게 방침이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리셉션의 벽에는 여러가지 잡다한 상징물들이 가득하다.
이곳을 거쳐간 순례자들이 기부한 건지, 주인장이 다 수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사납게 보이면서도, 왠지 특유의 분위기를 풍긴다.





한 쪽에서는 오래된 순례자 친구들의 모임이라도 하는지, 잔을 들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으흠, 아무래도 마녀의식이란 기미는 하나도 보이지 않네.


아베 페닉스 알베르게 내부. 뒤로 보이는 산티아고 성당


(호스텔 아베 페닉스 - 약간의 기부금을 내면 오세브레이로의 알베르게까지 짐을 옮겨주거나 안수 치료를 해주기도 함. 아베 페닉스는 말 그대로 잿더미에서 생겨난 곳이다. 이전의 호스텔이 화재로 타버렸던 것이다. 새 알베르게를 짓기까지 중간에 이곳을 찾은 순례자들은 텐트에서 야영을 해야했다.

벽에 걸린 낡은 신문기사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가 담은 메시지는 몇 번이고 되새길 가치가 있다.
'까미노는 자기 안의 명상을 위한 시간이지, 단순히 관광을 위한 길이 아니다.' El Camino es tiempo de meditacion interior, no itinerario turistico. -출처 : The Pilgrimage road to Santiago)




#일본인 순례자, 디토 할아버지와의 만남

일기장을 챙기고 다시 리셉션으로 내려왔다. 
호스피탈로의 눈치를 조금씩 보며 체리를 한 움큼씩 집어 먹고 있는데
동양인 한 명이 내가 앉은 테이블로 왔다.
그는 일본인 순례자, 디토 씨다. 연세가 80세라지만, 정말 정정해보이시는 분.
한국의 산을 매우 좋아한다며, 내가 가보지 못한 산들의 이름을 몽땅 다 꿰고 계신다.
왠만한 한국의 도시는 다 가보신 것 같다.

"왜 이리 한국 순례자들이 많지? 정부에서 지원해주니?"
라는 할아버지의 엉뚱한 질문에 웃어보였다.
한국에 산티아고 여행책이 나오면서부터 1~2년 사이에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설명해드렸다.

디토 할아버지는 자신의 일본인 친구를 봤는지 궁금해하신다. 친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못 찾고 계신단다.
오늘 일본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할아버지는 또 내게 묻는다.

"레온에서 베드버그에 왕창 물렸어. 정말 간지러워 미치겠는데... 혹시 약 있니?"

할아버지의 팔을 자세히 보니, 베드버그 물린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옷을 다 벗고 주무셔서, 몸 전체에 물렸다고 하신다.

오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얼마나 간지러울까.
하지만 한편으론 레온에 머무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베드버그에 물리면 정말 정말 간지러우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도 별다른 약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서 죄송하다는 말만 전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벌써 9시가 훌쩍 넘었다. 우우. 
이제 잠 잘 시간!



#지붕이 무너지면 어쩌지?? 

마을에 구경하랴, 밥 먹으랴 유심히 볼 새가 없었던 알베르게 내부. 
6유로 내고 하룻밤 묵는 것 치고 정말 부실해보일 수가 없다. 
이 많은 침대들의 무게를 바닥이 지탱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보금자리는 지붕이 경사진 끝 쪽에 있다.
센스있게 별 모양 창문이 있지만,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다. 방금 전에 디토 할아버지에게서 베드버그 얘기를 들어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잠자고 있는데 천장에서 베드버그가 후루룩 떨어지면 어쩌나.
여기 매트에 베드버그 잔뜩이면 어떡하나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영양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내 자리. ㅎㅎ



#후회하지 않을 선택하기, 앞으로도

밖에는 비가 내리는지 빗소리가 거세게 들린다. 천둥번개를 맞으면 폭삭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이 알베르게.
실내 조명이 밝지 않아서 그런가?
이제까지 머물어본 곳 중에서 분위기가 가장 요상한 곳이다.
에잇. 마녀의식도 못 봤는데, 그냥 같은 가격에 더 좋은데 갈 수도 있었을련만.

그래도!

오늘 마음 먹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내일 아침에 여기를 지나면서 후회했을 것이다.

비록 내가 고대했던 마녀의식은 못 봤지만,
적어도 오늘 마녀의식이 행해지지 않았고, 
이 마을의 보물 같은 성당도 짧지만 3군데 방문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시도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고
모르는 것보다
우선은 해보고, 알게 되는 게 현명한 일인 것 같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언젠가 찾아올 후회를 뒤로 미뤄 두고
무작정 앞으로 걷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 마음이 닿는 곳을 살펴가며 걸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배운 것 같다.

당장에 보이는 눈 앞의 후회일지라도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결정이라면
그건 최상의 선택일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괴롭힐
고통을 알아보는 것.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선택하기- 

꼭 까미노 위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에서도 유념해야겠지.  


무튼, 하루동안 열심히 걸어온 나를 위해 이제 푹 쉬어줄 시간.

잠자는 동안 별 탈이 없기를 기원하며 잠에 빠져든다.


P.S * 마녀의식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잠자기 전에 괜시리 겁을 먹어서 그런지,
간밤 꿈에서 장작불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마녀가 나왔다!

내가 보고 싶어서 만들어낸 꿈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자서 그런지
알 수 없는 신비한 꿈. 훗.
 
결국은 마녀의식을 본 것이다.
꿈에서. ㅎㅎ



오늘의 코스>ㅅ <!!!

Molinaseca -
Ponferrada - Camponaraya - Cacabelos - Villafranca del Bierzo = 31km


오늘의 지출~

제과점 아이스크림 2.8 + 핫초코 1.3 + 과일 0.7 + 숙소 6 + 저녁식사 10 = 20.8유로


Today's Stamps!!





일디즈 입니다~~
왠지... 이번 글은 포스팅 완전 빨리 할 것 같은 기분.

이었지만... 마음 먹은지 몇 주가 지나서 이제서야. ㅎㅎ;;
이렇게 느려서 여행 가기 전에 다 완성 하겠나 싶은데.

이 놈의 마음 먹기에 달린 일이니, 마음 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겠네요. 
아, 그래도 끙끙대며 쓴 글을 포스팅하니 기분이 개운하네요.

봄 기운이 살랑살랑 올라오는 요즈음.
봄 냄새에 까미노의 순간들이 예고없이 떠올라
갑자기 마음이 설레어지기도 한답니다.

그래요, 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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