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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26] 순례 24일째, 당신의 평화를 빌어요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26] 순례 24일째, 당신의 평화를 빌어요

Yildiz 2011. 5. 1. 11:16


혼자 걸어서 심심하고 힘들었던 날... 
   2008년 6월 16일 월요일

새벽에 내린 비가 그친 아침.
어젯밤에 잠들기전 별별 걱정을 했던 것에 비해서 잘 잔 것 같다.
베드버그를 걱정했었는데, 새롭게 물린 데가 하나도 없다.
휴, 다행이다.



어제 무리하게 많이 걸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워서 쉽사리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사실 일찍 일어나서 걷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기에
순례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늦게 출발하는 것 같다. 
배낭을 다 꾸리고 신발끈을 고쳐매고, 출발 준비 완료! 
8시가 다 되어가는구나.  
  


어제 저녁식사를 했던 식당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목.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침.


이왕 늦게 출발하는 거 느긋하게 가려고
문이 열려 있는 바에 들어가 빵 한조각과 꼴라까오로 아침을 대신한다.


Good bye, Villafranca del Bierzo.


어제 까까벨로스Cacabelos에서 머물었다면, 이곳에 있는 엄청난 성당들을 그저 겉만 보고 지나가야 했을텐데. 몇 군데라도 들어갔다 왔다는 게 참 기쁘다.

이 마을을 벗어나면 두 갈래길이 있다고 들었다. 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도로로 가는 길이 있다고.
비도 오고, 힘도 그리 넘쳐나지 않으니.. 산길은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도로를 택한다.



사실 산으로 가는 길을 못 찾기도 했다. 


이윽고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를 벗어나 고속도로 한쪽으로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한다.


구름은 개고 해가 비추는데 비가 내리는 건 왠 걸.


보통 6시에서 7시 사이에 출발하다가,
오늘은 8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길에서 순례자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로구나.  



혼자 걸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쌩쌩 지나쳐 가는 자동차에 비해 엉금엉금 걸어가는 내 속도는 소외감을 준다.
여기 무슨 경기장 트랙도 아니고.
노란색으로 깔린 길 색깔도 마음에 안든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걷다보니, 어느덧 도로를 벗어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인사

마땅히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해 내내 걷다가
길 가의 낮은 담 위에 앉아 아까 가게에서 산 것을 주섬주섬 꺼내 먹기 시작한다.
 
알베르게에서 나보다 더 늦게 출발한 로빈이 벌써 내 앞을 성큼 지나간다.
웃으며 인사하는 로빈.

"See you later 나중에 보자."

"그래." 라고 대답은 했지만, 알 수 없다.
글쎄... 로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로빈은 으레 오늘 도착하게될 알베르게에서 나를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현재 내 체력으로는 로빈이 도착할만한 곳에 절대로 닿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안다.
이렇게 하루 이틀 간격이 벌어지다 보면, 어쩌면 더이상 로빈을 못 볼 수도 있다.

See you later.
이게 마지막 인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꼭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인사 속에는 언제나 '마지막' 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이건 나 혼자 너무 앞서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가버린 그를 불러 세워, '이봐, 이게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는거 알어?' 라며,
말하려다가 혼자 속으로 삼킨다.

앞으로 남은 까미노 길 위에서의 우연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섬유유연제 한사발 나올법한 진한 장미향에 놀라자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기념촬영 해드렸다.

 


#혼자 걷기

내겐 까미노 가이드북도 없고, 지도도 없고 해서
노란색 화살표만 믿고 따라가는 길이지만,

오늘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얼마 없고,
어쩌다 스쳐 지나가도 처음 보는 순례자들이다.
요 며칠 30km 이상 걷는 날이 많아서 같은 날 출발한 순례자들보다
앞서 걷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전방에 있는 순례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혹시나 아는 사람일까 싶어 따라잡더라도,
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휴, 알베르게에 먼저 도착해 있으면 누군가는 오겠지.



꼬불꼬불 오르막길을 오르고 올라 갈래길에 섰다.
이대로 아스팔트 오르막길을 따라 갈 것이냐
아니면
산으로 난 길을 갈 것이냐 고민하다
결국은 산으로 정했다.


...그리곤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스팔트 길을 택했는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 하나 없다.




#말똥을 벗삼아 걷기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라 빠르게 걷기 힘든 것도 있지만, 앞서 가는 사람도 없고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으니 좀 무섭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길 위의 모든 것들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까딱하면 뱀이 몰래 나와 내 앞을 스스륵 지나갈 것 같다는 상상을
축축한 길을 걸으며 해본다.

혹시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이 길을...
어서 벗어나고 싶단 생각 뿐.



그래서 무조건 전진,
전진.
전진하지만..

도저히 속력을 높일 수 없었다.
이내 바위 계곡을 만나 살금살금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돌의 물기 때문에 성큼성큼 걸을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한 장애물...
장애물!

그건 바로...
말. 똥.

.......;;


말을 끌고 순례하는 사람들이 이 길로 갔나보다.
몇 마리의 말과 함께 갔는진 모르겠지만..

녀석들...

누가 똥 잘 싸나 시합이라도 했나.

왠 똥을 이렇게 많이도 싼걸까.
으...
똥 밟기 싫어...

안그래도 젖은 땅인데, 말똥 피하랴, 바위를 조심히 밟고 지나가랴.
물기 있는 돌 밟으며 가는 길도 험난한데, 이놈의 똥도 피해다녀야하다니.
하아. 힘들구나.
어여 어여 가자.


그래도 말똥,
요게 노란색 화살표 대신
까미노 길임을 나타내는 징표가 확실하니.
그나마 안심.
난 옳게 길을 걷고 있다는.

싱싱한 말똥,
너마저 없었다면, 난.

무지 외로웠을거야.



#라 파바La Faba에 도착하다

이윽고 도착한 La Faba 의 알베르게.
독일 순례자 협회에서 운영하는 거라 그런지 독일인들이 많이 오는것 같다.


 


이 알베르게는 크게 3개의 공간이 있는데 아담한 주방 하나, 가운데에는 남녀 화장실, 그리고 침실인 큰 방 하나는 칸막이로 공간을 구분을 해놓았다. 
그리 나쁜 여건은 아니지만, 단점은 화장실 겸 샤워실이 한 칸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순례길동안 처음으로, 샤워를 하기 위해 20분정도 화장실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숙소에 일찍 도착한 편이어서, 샤워를 하고는 낮잠을 잤다.

달콤한 낮잠을 잔 후, 부엌으로 가서 일기 좀 쓰고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먹을 것 몇 개 샀다.

마가렛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서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갔었는데,
베이컨이 거의 타서 나와 먹는 둥 마는둥.
마가렛은 홀로 레스토랑에 온 스위스 순례자와 독일어로 신나게 이야기하느라
나는 찬밥이 되었다.



#당신의 평화를 빌어요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산 안드레스 성당.

 


식사 후,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성당에 왔다. 
순례자들이 참석하는 평화를 위한 미사가 곧 시작하려 한다.

착석한 순례자들의 얼굴을 살펴보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없다.
아니다. 딱 한 명있다.

화장실 세면대 거울에서 눈이 마주치면서 인사한, 캐나다에서 온 순례자.
이 여성은 남편과 함께 까미노에 왔다.


성당 내부. 평화를 위한 미사가 열린다.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로가 앞으로 나와 독일어와 영어를 번갈아 써가며 미사를 진행한다.
성당에 다니는 이라면 다 알법한 그런 성가를 부르는데, 나는 모르니 그저 듣기만.

독일인 호스피탈로는 사람들에게 모두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게 했다. 
서로의 평화를 빌어주는 의식을 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선 순례자들에게 포옹을 하라며 시켰다.
그러자 서슴없이 자기 옆에 있는 순례자들과 포옹하며 인사하는 사람들.

아,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낯선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포옹한다는게 참 쉽지 않구나.
다른 이들은 서로 포옹을 하며 미소를 짓는데,
혼자 꿀먹은 벙어리마냥 제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다.

그런데, 그 캐나다 여성의 남편이 내게 와 묻는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Peace'를 한국어로 뭐라하나요?"

"평, 화"
외국인에게 결코 쉽지 않은 한국어를 천천히 발음한다. 
내 발음을 따라하는 그.

"평, 화."
그리고 포옹을 해준다.

그에게 '평화'라는 말을 함으로써
얼음 같았던 내 마음이 녹아
따뜻한 물이 되었다.

이제껏 내가 알아온 '평화' 라는 단어가
그리 거창하지도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구나.

그동안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
아까 홀로 산 길을 걸으며 두려웠던 마음이 위로를 받는 기분이다.

평.화.
이 외국인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하는 틈새에 

캐나다 여성이 내게로 와 포옹을 해준다.
그제서야 나도 용기 내어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포옹을 한다.

짧은 의식이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음.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마음을 열고 내게 다가와 준 것에 정말 고맙다.
덕분에 시렸던 마음이 따뜻해졌다. 



#넌 여기 왜 왔니?

알베르게로 돌아와 씻고 잘 준비를 하는데, 방으로 가는 내 걸음을
어떤 아저씨가 붙잡는다.

"넌 여기 왜 왔니?"

'네가 뭔데 여기 왔어?' 이런 식의 뉘앙스가 아닌 정말 궁금해서 묻는 물음.
그의 눈에서 '동양인 여자애가, 그것도 어린 애가 왜 혼자 왔지?' 라는 궁금증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처음 보는 사람이라 통성명도 안한데다가,
내가 왜 까미노를 오게 됐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면
자리를 깔고 앉아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야한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순 없으니...

화장실을 사이에 둔 부엌과 방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대면한 그에게
한단어로 이유를 말한다.

"호기심Curiosity 때문에요."
 
" ?? "

내가 영어 발음을 잘 못해서 못 알아듣는가 싶었는데,
지나가던 독일 여성이 아저씨에게 독일어로 알려 준다.



#생각나는 사람, 그리운 이

오늘은 유난히 처음 보는 순례자들 틈속에 있다.
혹시나 군이 이곳에 올까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은 잘 있을까.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도 낮에 잠을 좀 잤더니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꿈뻑거린다.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이 생각 저 생각.
그리고 슬픈 생각.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상처를 주고 떠나야했을까.

어둠은 과거의 기억을 불려와
나를 못난이로 만든다.

못난 사람의 가슴은
이내 쭈글쭈글해져 주름진다.

주름진 가슴 사이로 삐져 나와
침낭을 적시는 눈물 줄기. 



오늘의 코스>ㅅ <!!!






Villafranca del Bierzo
- Trabadelo - Vega del Valcarce - La Faba 25.6km



오늘의 지출~!

숙소 4 + 까페에서 아침 2.8 + 슈퍼 11.65 + 저녁식사 9 + 교회 1 = 28.45유로


Today's Stamp!


 


안녕하세요, 일디즈입니다.
여행 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여행 가기 전에 끝내겠다는 이 글은 여전히 느리게 진행중이네요.
모든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걸 알면서도
좀생이 같은 마음 챙기기 급급해서 잠시 멀어졌던 까미노 이야기 입니다.

요즘 좀 그래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까미노의 장면들.
갑자기 스페인의 슈퍼마켓을 헤매던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
스페인어가 가득한 바에 혼자 서성이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
아침에 지하철 타며 출근하면서, 지하철 타러 가는 그 짧은 걸음에도
이대로 계속 해서 걷고 싶은 욕구가 불쑥 고개를 내민답니다. 순례자의 길이 정말 그립나봐요.

종일 내린 비로 축축한 비루한 내 방이
종일 내린 비로 축축한 알베르게 도미토리 방이였으면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까미노.
까미노.
다시 가야지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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