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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27] 순례 25일째, 자아를 강하게 하는 길 Camino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27] 순례 25일째, 자아를 강하게 하는 길 Camino

Yildiz 2011. 5. 11. 21:18


다 괜찮아질거야!
2008년 6월 17일 화요일


좀 더 푹 자고 싶은데, 사람들은 그게 싫은가보다.
아, 내가 까미노 초반엔 그렇게 일찍 일어났었는데, 그게 다 사람들 힘들게 하는 것이었군!

간밤에 잘 잤는데도, 피곤하고 걷기 귀찮음을 느끼는 건 뭔지.

하지만 밖으로 나와 맑게 개인 하늘을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길을 열심히 두리번 거린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난 노란색 향기나는 꽃. 파란색, 초록색, 게다가 구름의 흰색까지.
내가 좋아하는 색들이 한데 모여 굉장한 그림을 만든다.



오늘의 코스는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마을까지 급 오르막길을 올라서 고도 1300m 정점을 찍었다가 도착 예정지인 트리아카스테라Triacastela까지는 내리막길이다.
트리아카스테라Triacastela까지 가는 걸로 해서 남은 까미노에 더 이상의 높은 고도를 가진 코스는 없다!
오늘만 좀 더 고생하면 된다.

높은 고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도 오늘부로 마지막이로군.
열심히 구경해야겠다.

산 능선에 탈지면 같은 구름이 그냥 막 붙여놓은 듯 얹혀 있다.




노란색 꽃나무에선 좋은 향기가 난다!


좁은 오솔길를 따라 걷다가 3명의 순례자를 만났다.
모두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들로, 노부부와 혼자 온 여성 순례자.
그들의 이름을 묻고는 한참을 중얼거리며 외웠다. 갸브리, 로레따, 앵리꼬.
부부는 먼저 앞서가고, 앵리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걷게 되었다.

앵리꼬는 영어가 서투르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영어 대신 얼마 알지 못하는 스페인 단어를 떠올리려 애썼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로 서로 어떻게든 이야기가 통하니 참 재밌는 일이다.

어제 앵리꼬가 이탈리아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는 영어 단어를, 나는 스페인 단어를 머리속에서 끄집어내려 가지가지 노력을 다했다.


자연 앞에 내가 얼마나 콩알만큼 작고 먼지처럼 가벼운지를...


내가 혼자 여행한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여행이 남아있다는 걸 알게된 앵리꼬는 무척 놀란다.

"you, macho."

macho? 마초?
내가 헉, 이럴 사이 그녀는 자신의 뜻을 수습한다.

"너는 작은데, 강해."

영어 'strong' 을 말하고 싶었는데 macho가 먼저 생각났나보다.
오해가 있을뻔 했지만 갖은 손발짓을 써가며 하는 불완전한 이 대화가 정말 유쾌하다.



#느낌이 좋은 마을,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어느새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 다 왔다.
완만한 산줄기가 만들어 내는 산계곡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으려 하자, 그녀가 내 사진을 한장 찍어주겠다고 한다.

그녀가 나를 칭찬해준게 생각나, 힘이 세보이는 척 하면서 포즈를 취한다.




앵리꼬 사진도 한 장 찍었다. ^^



덩치 큰 개.. 자기 집 앞에서 자는 건지 남의 집 앞에서 자는 건지...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
낮은 언덕 위로 올라가면 한 눈에 다 보일 정도로 정말 작은 마을.
오래되어 보이는 이 마을. 왠지.... 좋은 기운을 풍기는 것 같다.
이곳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느낌이.
느낌이 그렇다. 느낌이 정말 좋다.

앵리꼬와 함께 마을의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부르고스나 레온의 성당처럼 으리으리하면서 크고 멋진 외관은 아니지만, 이 작은 성당은 꽤 오래되어 보인다.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걸까.  

 


 

오 세브레이로의 성당 입구

 


(순례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 오 세브레이로의 기적은...... '가난하지만 독실한' 소작농 한 명이 무시무시한 눈보라 속에서 목숨을 걸고 미사에 참석하러 이 성당을 찾았다. 오만한 사제는 멸시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으며 이 농부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넸다.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했다. 또한 성당 안의 마리아상도 이 기적적인 광경에 고개를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




성당 내부 정면



산타마리아 - 성배와 성반


성당을 한바퀴 둘러보고, 출입구 쪽에 있는 가판대로 왔다. 여러가지 기념품을 팔고 스탬프를 찍어주는 곳이다. 크리덴시알에 정말 정말 멋진 스탬프를 받고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지금까지 받아온 스탬프와는 스케일부터 다르다! 방금 받은 따끈따끈한 스탬프에 한없이 기뻐하다가 가판대 위에 있는 기념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이곳에서 지인을 위한 선물을 하나 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가지 팬던트와 묵주들을 살펴본다. 

한국에서 출국하기 이틀 전, 긴 여정을 시작하려는 나를 걱정하던 선배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묵주를 내게 주었다. 손목에 차고 다닐 만큼 늘어나는 게 아니라서 배낭에 있는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있다.
 
언니 이름과 같은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어울릴만한 팬던트를 하나 골랐다. 십자가에 국화꽃 무늬가 놓여진 팬던트다. 언니와 꽤 잘 어울릴 것 같다.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가비 모양 팬던트는 나를 위해, 갈색 십자가의 긴 묵주는, 혹시 모를 누군가를 위해 하나 산다. 

성당에서 나와 앵리꼬는 다시 이탈리아 부부와 동행하고, 나는 마을의 입구쪽으로 다시 와 사진을 찍는다.
그새 안개가 걷혀서 맑은 하늘 아래,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보인다.


마을의 지붕이 특이하다. 울릉도의 전통 지붕이 이렇던가?



오른쪽의 담은 성당의 담벼락.



이 동상을 다시 찍고 싶었다. ㅎㅎ


성당쪽으로 다시 와 가까이에 있는 바로 들어왔다. 이미 자리를 잡은 순례자들로 북적북적하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아침에 꽤 쌀쌀했기에, 꼴라까오(코코아) 한 잔을 시켜 몸을 녹인다.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여 엽서 한 장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샀다.

바에서 나와 노란색 표지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왔다.
한 눈에 보이는 오 세브레이로.


Good bye, O Cebreiro!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는 거라 아쉽다.
다음에 또 까미노에 오게 되면 꼭! 여기서 하룻밤 머물고 싶다.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 봄. 살짝 보이는 마을의 지붕.


안개가 걷힌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이슬이 풀잎마다 맺혀있다.
작은 잎사귀에 저마다 반짝이 스티커를 붙여놓은 듯이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보석처럼 빛나는 이슬은 처음이다.





#내면의 울림, "다 괜찮아질거야!"

계속 되는 오르막길.
배낭무게 때문인지, 길이 험해서인지 다리가 쑤시고 아프다.
천천히 걸으면서
한 호흡, 순간에 집중을 하며 걷는다.

'괜찮아질거야.'

그래, 괜찮아질거야.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해서 일부러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이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순례자로서 까미노를 머지않아 떠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왜 이리 슬픈지.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기억 창고에 꽁꽁 숨겨두고 싶지만 제 갈길을 몰라 부유하고 있는
과거의 수치들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다.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무릎의 통증은 통증대로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마음의 통증은 통증대로

혼자서 부대끼다 보니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힘들다.

그런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


모두 다 괜찮아질거야.

그래, 괜찮아질거야, 정말.



꾸역꾸역 걸어야하는 고달픔이 있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거나
산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순간의 고통은 사라지고
세상의 경이로움만 남는다.





#개들과의 신경전

산 중에 작은 마을을 지나치는데 마땅히 쉴 곳이 없어서
오래된 무너진 담벽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아침에 만든 샌드위치를 하나 꺼낸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개 두마리가 내게 다가온다.
아니, 그냥 개라고 하기 보다는 늑대 같이 생긴 들개 두마리.
(사실 난 늑대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저 무섭게 생긴 개였음을 알아주시라...)

지저분한 털이며, 사납게 생긴 인상도 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먹던 빵조각을 뜯어 던져주니까 글쎄...
공중에 뜬 빵조각을, 날름.
그 커다란 송곳니를 다 들어내며
공중에서 빵조각을 잡아내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처럼 플레이되면서
내 뇌리에 박혀버렸다.

충격이다.
자칫 잘못하단 나도 저렇게 먹히는 건 아닐런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먹던 빵을 배낭 안에 넣고 갈 채비를 한다.
눈 앞에 먹을 것이 사라지니
개들이 가버린다.

휴... 다행이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2분정도 지났을까.

앞으로 가야할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기 전에
먹던 걸 마저 다 먹어야 힘이 날것 같아 배낭에서 빵을 꺼내는데...

배낭에서 빵을 꺼내는 도중인데도 불구하고!

요놈들이 그새 냄새를 맡았는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둘이 나란히 걸어 내게로 온다.

뭐야. 이것들.
정체가 뭐야 ㅠㅠ

당황하여 재빨리 빵을 배낭에 넣는다.
그러니 또 가버리는 녀석들.

무섭다.
오르막길 버겁다고 느낄 새 없이
어서 개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언덕으로 올라오니
길 오른편에 떡하니 있는 바.
그리고 테라스에 편안히 쉬고 있는
앞서간 스위스 할아버지 순례자.

고작 5분만.
조금만 참고 올라왔다면
개들과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을텐데.

아랫마을에서 지체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바에 앉아 쉬는 게 왠지 사치처럼 느껴져서 계속 길을 가기로 한다.



#트리아카스테라Triacastela로 가는 길
 


Alto de San Roque 해발고도1,270m


까미노 후반 코스의 가장 높은 고도인 곳에 왔다.
Alto de San Roque.
이곳을 정점으로 이젠 내리막길만 남았다.


어제 La Faba 알베르게에서 만난 캐나다 부부. 가운데는 순례자 동상.



바람에 살랑이는 풀들.



한 낮에 낮잠자는 개들. 길 한가운데 검둥이, 하얀색 집 벽쪽에 풀위에서 자고 있는 누렁이.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모여 웃는다. 무얼 보며 웃는가 했더니, 돼지 한마리였다.



산티아고까지 135km 남았다는 건가...


 


저기 산 아래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 머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힘이 난다.



이어지는 내리막길에는 쉴 곳도 별로 없고, 화장실이 없어 불편하다.
어서 알베르게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

아침에 앵리꼬와 함께 걸은 것 이후로는 줄곧 혼자 걷는 길.
앞서 걷는 사람, 뒤에서 오는 사람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걷는 길 위에서,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를 떠올려 본다.
까미노를 걸으며 고민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지만,
두리뭉실 생각의 실마리만 여기저기
흐트려놓은 꼴만 되었지
제대로된 가닥 하나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결국.
가파르고 위험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딱 한 가지만 선택하기로 했다.

다 집어치우고,
그냥 걷는데 집중하자.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길 무사히 내려가는거야.



 




#Welcome to Triacastela!

순례자협회에서 운영하는 트리아카스테라의 알베르게는 인가가 드문 곳에 있었다. 오솔길을 걸어오다가 알베르게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엔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여기에 알베르게가 있긴 있어? ' 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넓고 황량한 공터가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을 뿐.

주구장창 내리막 돌길을 걸어온 터라, 드넓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은 신세계 같다.
의심을 품고 걸은 끝에 드디어 알베르게 건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일찍 온 순례자들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날 보더니 엄청나게 반가워하신다.
비르겐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순례자다. 알베르게 부엌에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신 아저씨. 체리를 귀걸이인 것처럼 귀에다 걸고 사진을 찍으셨었지.

힘들었던 하루동안의 순례 여정을 마감하는 이 순간.
알베르게에 도착한 나 스스로보다,
이탈리아 아저씨가 더 기뻐해주신다.

마치, 마라톤 경기의 골인 지점에서 코치가 선수에게 양팔을 활짝 열고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 같다.

아저씨가 이탈리아어로 말하니, 내가 이해할 순 없지만.
너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런 뜻이 아닐까 추측만 할뿐.

생각지 못한 환대에 그저 멋쩍어 웃어보였다.

크리덴시알에 스탬프 찍고, 숙박비 지불 후 호스피탈로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내려간다. 
험한 내리막길을 지나온 터라 그런지 평평한 계단으로 내려가는데도 발바닥이 아프다.
배정된 방으로 들어왔을 땐 놀랍게도 아침에 만났던 이탈리아 순례자들- 갸브리, 로레따, 앵리꼬가 이미 와 있었다. 이런 재밌는 우연 때문에 까미노가 즐겁다.


한낮의 시에스타를 즐기는, 마을의 개.


초간단 스피드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널고 난 후, 트리아카스테라는 어떤 마을인지 궁금해 마실을 나온다. 마을의 중심을 향하는 길에는 숙박업을 하는 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내일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까미노 방향을 미리 눈여겨 두고, 마을의 성당을 찾아갔다. 
길 위에서의 나의 아둔함을 깨치고 좀 더 진지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기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당 옆에 이름 모를 이들의 묘가 있어서 잠시 멈칫 했다.
한번 들어가볼 요량으로 성당 입구로 가니, 저녁에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다는 종이가 문에 붙여져 있다. 
좀 이따 다시 와야 겠다.

알베르게로 가기 전에 슈퍼에 들러 먹을 것을 왕창 샀다. 초콜렛, 요거트, 과일, 빵, 쨈등.. 내가 항상 먹는 식량들. 내일 아침을 위해 샌드위치도 미리 만들어 놓고 쉬다 보니 미사 시간이 다 되었다. 



#특별한 미사, 순례자를 위한 미사

미사에 참석한 순례자들은 생각보다 얼마되지 않았다.
신부는 순례자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국적을 물어본다.

독일인 순례자에게 프린트된 종이 한 장.
프랑스인, 스페인 순례자들에게 신부는 각각 종이를 나눠준 다음
앞으로 나와 단상 위에 있는 의자에 앉도록 시킨다.
 
나를 힐끗 쳐다보는 신부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애써 피하고 싶었지만, 숨을 곳이 없네.

"일본사람입니까?"
신부가 나를 보며 묻는다.

"아뇨, 한국사람이에요."

아마도 일본어로 프린트된 종이가 있나보다.
"일본어를 아나요?"

다행이다. 일본어를 몰라서 앞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내 나는 한 장의 종이를 받아야 했다.

미사에 참석한 미국, 캐나다, 영국인 순례자가 한 명도 없어서
영어로 프린트된 종이는 내 것이 되었다.

앞으로 나가 의자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노란색 조명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독일어, 스페인어, 불어가 끝나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내 차례다.

기도문인것 같은데,
발음이 틀리거나 어색할까봐 긴장하면서 겨우 읽어 내렸다.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고 싶지만, 친숙한 nosotros, padre, madre 밖에 안 들리니 너무 아쉽다. 
단순한 관광, 스포츠를 위한 까미노가 아닌 '영적인 차원' 에서의 까미노를 강조하는 영어로된 글을 미루어 볼 때 신부님이 어떤 얘기를 했을거라 지레 짐작해본다.

난생 처음으로 엉겹결에 하얀색 빵을 받아 먹었다.
'전 원래 교인이 아니에요~' 라며 내빼기엔 너무 멀리와버렸다.


성당 벽에 붙여 있는 순례자들이 쓴 문장들. 한국어를 보니 반갑다.


조용히 있다가 가려고 했던 미사. 예상치 못했던 일들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내 생애 흔하지 않을 이 특별한 미사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트리아카스테라의 작은 성당과 신부님도.


미사를 마치고 난 후. 날 보며 살짝 웃으시는 신부님.




#슬퍼하지만 말자.

까미노가 머지않아 끝날거란 사실에 슬퍼했었는데,
까미노의 끝을 염두해두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애쓴 하루였다.

까미노에 끝이 있듯 인생에도 끝이 있는 건데,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사는 게 아닌,
이미 지나간 것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게 현재의 자리를 너무 많이 내어주고 있구나.
오늘 어려운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깨달았다.
정작 불필요한 것들 때문이 시야가 흐려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보지 못한 채
이게 진짠지, 저게 가짠지 구별조차 어려운 어둠을 당연하다는 듯 여기며 살고 있진 않았었나.
진정 오롯이 현재를 살 필요가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남에게까지 인상 쓰지 않고, 웃을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하고,
목표를 진지하게 꾸준히 바라보며 나아가야겠다는 거.
오늘 힘든 여정을 보내며 간간히 마음 먹은 것들이다.

그리고... 무언가의 끝이 있다는 것에 너무 슬퍼만 하지 말자.
내가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면,
끝에 다다랗을 땐 그만큼의 보람됨과 기쁨도 함께일 것이라는 사실.
 '죽음' 이 있어 살아있는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무엇이든 처음과 끝이 있게 마련이다.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니까.
새롭게 맞이할 시작을, 끝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준비해야할 것이다.

오늘은 비록 하루가 쉽지 않았지만,
고통이 따르는 만큼
보다 더 진지해질 수 있었던 하루였다.

일기를 다 쓰고, 발바닥 마사지 후 잠을 청한다.
피곤이 산처럼 밀려온다.


오늘의 코스>ㅅ <!!!

La Faba - O Cebreiro - Alto de San Roque-Triacastela = 25.4km
 

오늘의 지출~!!


숙소 3 + 까페 2.8 + 기념품 13.25 + 엽서 0.3 + 중간에 슈퍼 1.25 + 도착해서 슈퍼 9.78 + 과일 1.34 = 31.72유로



Today's Stamps =ㅅ =!!



 



3년전에 쓴 일기이지만...
사람이 일순간에 현명해지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를 두려움 속에 있는 제게
꼭 이 날만큼 썼던 힘과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거든요.
이미 한번 겪어봤던 것들이니, 어려울 것 없지 않겠냐만은.

아직 끝모를 터널 속을 걷는 듯한 기분입니다.

음,
다 괜찮아질거야. 라며 속삭여봅니다.

그래요.
우선은 끝까지 걸어가봐야겠죠.

두려움 한편으로
절대 놓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들 때문이죠.

언젠가 예기치 못할 선물을 받을 거란 걸,
까미노의 끝에서 배웠답니다.

그러니,
터널 끝에서
무언가는 하나 발견하겠죠.

하루 빨리 이야기를 다 털어내야지,
안 그럼 정말 병나겠습니다. ㅎㅎ
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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