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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23] 순례 21일째, 네 번의 코피를 쏟으며 Rabanal에 간 까닭은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23] 순례 21일째, 네 번의 코피를 쏟으며 Rabanal에 간 까닭은

Yildiz 2011. 2. 6. 18:13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어! 2008년 6월 13일 금요일


순례자가 일찍 방을 나서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을 푹 잔 것 같은데, 어제의 여독을 제대로 풀기엔 부족했는지 몸을 일으키는데 버겁다.
혹시나 공짜 아침이 있나 해서 리셉션을 살펴봤지만, 휑하다.
역시.
어제 호스피탈로가 아무 말 없었던 것은 더이상 공짜 아침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선 공복으로 걷고, 다음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해야겠다.


 


긴 밤 잠들었던 대지의 색(色)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유일하게 하나이지만,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꼭 다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태양은 어제의 태양과 같지 않다.
시간에 따라 그도 나름의 변신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어떤 까닭에선지 십자가가 놓여있다. 그것도 꽤 큰.특별한 의미가 있는걸까.





#흐른다, 뻘건 코피가.

한 20분정도 걸었을까.
코에서 차가운 액체가 흐르는게 느껴진다. 콧물인 줄 알고 만져봤더니, 피.. 피다!!
오랜만에 흘리는 코피라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순례길에서 터지다니. 에휴. 
왜 갑자기 코피가 나지?

가까운 나무 기둥 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 손으론 코 윗부분을 꾹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더듬더듬 물티슈를 찾는다.
하필 휴지가 없을 때 코피가 날게 뭐람.
그나마 물티슈라도 있어서 다행이지만, 찾아 놓고 보니 2장 밖에 없다. 
이것마저 다 쓰고도 코피가 계속 나면 어쩌지?

하얀 물티슈를 뻘겋게 물들이는 코피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누가 지나가다가 나를 볼까봐 괜시리 신경쓰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고,
물티슈 2장 다 쓰고 나서야, 코피가 멈췄다.
으으.
아침부터 이게 뭐람.

얼마 안되는 피 같지만, 아침 식사도 안 했는데... 
왠지 기가 쫙 빠진 기분이다.






어디서부터 오는, 어디까지 가는 길일까. 궁금하다 그 끝이.


하지만 이내 굽이굽이 난 길과
끝모르게 펼쳐진 들판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침부터 코피가 나고 몸도 찌뿌둥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걷기 좋은 길이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개나리는 아닌데, 향이 정말 좋다.


게다가 금상첨화로 길 위의 순례자를 홀리는 향기 가득한 꽃나무가
나를 미친듯이 행복하게 한다.

전에도 길 위에서 한번 맡아봤었지만, 이 꽃향기. 정말 좋다.

개나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개나리는 아니고,
향이 진동하는 이 식물의 이름은 뭘까.



꽃향기가 너무 좋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꽃사진을 마구 찍는다. 향기를 담을 수 없으니,
형체라도 마음껏 담아가야지.
오늘은 군이 나보다 늦게 출발했나보다. 이제야 군이 나를 지나친다.
군은 꽃에 열중하는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인다.


코피 흘린 사람 맞나. ㅎㅎ


기분이 무척 좋아 셀카도 찍으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 첫번째로 닿을 마을의 전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바에 가서 아침을 먹어야지!



걷기 좋은 흙길을 걷다가 깔끔하게 정리된 길을 걷자니, '까미노' 틱한 맛이 안 난다. 인위적인 길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길이 '까미노' 답다고나 할까. ^. ^;



#코피가 또 주룩주룩

마을 입구에서 쭈욱 걸어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바로 군이다. 
왠지 여기서 만날 것 같았다. 그녀는 막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이다.



군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배낭을 놓고 주문을 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른 오전인데도 마을 사람들과 순례들로 가게 안은 북적거린다. 웨이터에게 먹음직스런 작은 빵과 꼴라까오(코코아)를 주문하고는 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콧속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아니나 다를까.
또... 코피 난다. ㅠㅠ

왼편에 있는 화장실로 급히 들어가 세면대에 우선 나오는 코피를 흘려보내고, 마침 화장실에 휴지가 있어 코피가 나는 왼쪽 콧구멍에 돌돌 말아 넣었다. 쌍코피가 아니니 천만 다행인것을.
코피를 수습하는 와중에,
'내가 주문한게 이미 나왔으면 어쩌지?',
'주문하고 도망간 걸로 알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이 들어 서둘러 화장실을 나왔다.


"군, 나 코피흘려요."
"오, 저런."

콧구멍에 있는 휴지의 존재감이 빵과 꼴라까오의 맛을 무가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묘한 능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코피때문에 싱숭생숭한 마음 때문인지, 입 맛이 없다.  

"그런데, 그저께 밤에는 잘 잤니?
내 기침소리 때문에 잠자는데 방해되지는 않았니?" 군이 내게 묻는다.

"음... 잠들기 전에 기침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저는 푹 잘 잤어요. 한번도 깨지 않구요. 왜요?"

"아마, 사람들이 내 기침소리 때문에 잠을 잘 못 잤을거야.
내가 밤새 내내 기침했거든.
어젯밤에도 밤새 기침을 많이 했어."

내가 의학 분야에는 거의 문외한이라 별다른 말은 못하겠지만, 
기침엔 커피보다 우유가 더 그럴싸해보인다.
 
"군, 커피 말고 코코아 드세요. 커피보다 우유가 감기에 훨씬 좋을 것 같아요." 

"난 아침마다 커피를 꼭 마셔야해. 커피를 무지 좋아하거든."
군이 웃으며 대답한다.


어제 Hospital de Obrigo 에서 머물었던 순례자들이 마을로 입성하기 시작한다.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앉아있으니, 하나 둘씩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게 된다.


항상 나를 잘 챙겨주시는 부부님 ^^



빅토리오 부부 그리고 오른쪽은 프랑스에서 온 마리 아주머니.


내 콧속에 말려진- 하지만 조금 티가 덜 나게 위치한 휴지를 보고는 다들 안됐다며 걱정해주고 간다. 
아침부터 난데없는 폭풍 코피에 당황했지만, 까미노 친구들을 한꺼번에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독일에서 온 헤르만씨 ^^




#진정 친구가 됨을 느끼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군과 나는 자연스레 함께 걷기 시작한다.
군과 함께 걷는 것은 오늘로 두번째.
무엇에 대해 얘기할까 고민하다가 군의 직업이 사서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내가 감명깊게 읽은 유럽 문학 작품 중에 그녀도 읽어본 책이 있을 것 같다.

"Gun, Do you know 서머싯 몸?, 서머셋 몸? 서머셋 모옴?"

군이 못 알아먹을것 같아 여러 버전으로 작가 이름을 말해보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내게 한국어로 익숙한 책 제목을 영어로 말해보자니, 도통 뭐라고 해야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영국 사람이니, 영국식 발음으로 이름을 말해야 아는 건지... 그리고 그의 '서머싯 몸' 에서 '몸' 이 단순한 Mom 철자가 아니니, 영어 발음이 난감하기도 하다.

작가 서머싯 몸의 이름과 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를 어필하는데 실패하고, 이번에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 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군은 알지 못했다. 아마 내가 독일어로 얘기했다면 그녀는 알아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이제 린저의 소설 '삶의 한 가운데서' 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문학 작품에 대해 영어로 토론하기에는 내 영어 실력이 턱 없이 부족함을 실감한다.

아, 또 하나 더 있지.

"군, 로맹 가리.. 로맹 가리 라고 알아요? 프랑스 작가에요. 그 사람 소설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제목이 뭐더라.."

이크, 한글판 책 제목은 아는데, 불어로 원제가 뭐려나?
로맹 가리, 그가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다. 영어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이야기 도중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음...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름이 모모에요. 모하메드."

"아, 꼬마 아이가 주인공인 그 책. 나도 읽었어. 난 로맹 가리를 무척 좋아해. 특히 수필. 그의 수필도 읽어봤니?."
"아뇨, 한국에 소개된 로맹 가리 책이 많지 않아요. 수필집은 못 본 것 같아요."

"아까 네가 말한 책 제목이 뭐더라?"

길을 걸으면서 군은 생각에 집중한다.
자기 앞의 생.. 그러니까, Life 는 들어갈테고. 알듯 말듯한 제목인데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

"책 제목이... The whole life in front of you. 일거야. 그치?"

나도 영어로 제목을 짜맞추는 중에
군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소설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릴때마다 생각나는 장면.  
로자 아주머니가 죽은 후, 모모가 꼼짝없이 방 안에 있던 장면이 여전히 생생하다.
어린 모모의 조숙한 언행에 웃기도 하고,
비록 소설이지만
정말 누군가 모모와 같은 일을 겪었을 것만 같아서.  
그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을 읽으며 나도 무척 슬퍼했었다.

이런 얘기를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싶었지만.
여행 오기 전에 이런 감상을 영어로 연습하고 올 걸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웃어보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소설 속 장면을 떠올리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 군을 만났을 때, 그녀와 나 사이에 차가운 벽이 있었고,
몇 번의 마주침과 인사로 벽이 점차 허물어졌다면,
로맹 가리는, 혹은 소설 속 주인공인 작은 아이, 모모는
그녀와 나 사이의 벽을 완전히 없애주었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 한 소설 작품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다니!
기분이 짜릿해진다.
이렇게 군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오늘의 기대되는 도시, Astorga 에 거의 다왔다. 


왼쪽은 군, 오른편에는 마가렛과 헤르만씨.




#매력적인 중세도시,아스또르가에 도착하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마을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발견한 성당과 오래된 건물을 보니, 이곳이 예사로운 곳은 아니겠구나 싶다.





나무가 참 예쁘다.





독특한 외관의 보석가게.


길을 따라 가니 이 마을에서 중요한 곳은 모조리 구경하게 되는 것 같다. 성당 같아 보인 건물은 알고 보니 시청사 건물이다. 
 

중앙 광장. 정면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시청사


중앙광장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산토실데스 광장에 닿는다. 이 광장 한 가운데에는 멋진 사자상이 있다. 외관상으로는 만든지 얼마 안 된 기념비 같은데, 비석에 새겨진 숫자를 보면, 꽤 오래전 일을 기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수리 같아 보이는 새를 제압한 사자의 용맹스러움은 힘이 넘쳐보인다.
기념비 주위에는 분수대가 가지런히 물을 뿜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마을은 발닿는 곳마다 매력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걸까. 마음 놓고 길을 잃고 헤매고 싶은 곳이다. 우선은 발가는 대로 걸어보고, 이번에 탐색하지 못한 곳은 다시 되돌아와서 이곳저곳 들쑤셔보기로 마음 먹는다.  


산토실데스 광장, Monumento a los Sitos.


(반도 전쟁(1808~ 1814에 있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 나폴레오의 전쟁) 당시 아스토르가에서 벌어진 공성전을 기념하는 멋진 사자상..  이 광장 건너편 왼쪽으로 초콜렛 박물관이 있다. 아스또르가는 초콜렛 생산의 중심지이다. 박물관의 큐레이터는 순례길의 동지이자 이 지역 협회의 회장이라고 한다.)


슈퍼마켓 창문에 크게 걸려있는 해산물 사진을 보니, 갑자기 매운탕이 먹고 싶어진다.


카페 야외에서 쉬고 있는 빅토리오 부부와 마리 아주머니 발견.
이젠 그들을 보면 자동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를 발견하시고는 웃어주신다.



피아 아주머니는 뒤늦게 나를 찾으셨다. ^^


오늘은 이 곳에서 꼭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가우디가 설계한 건물과 초콜렛 박물관이다. 길을 따라 걸어오니, 시야가 확 트이는 넓은 광장, 카데드랄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 반대편에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대성당도 멋지지만,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중세 시대의 성의 존재감도 만만치않다.

오오, 이게 말로만 듣던, 가우디가 설계한 성!!


뒤쪽 건물은 대성당, 오른쪽은 가우디가 설계한 성.



Palacio de Gaudi (가우디의 성), Museo de Los caminos (까미노 박물관)


(공주님이 살 법한 이 곳은, 현재
까미노 박물관으로 쓰인다. 북부 스페인의 주요 교역, 군사, 순례 루트가 된 많은 로마 시대의 길들의 역사적인 기록과 유물이 있다.)


박물관 입구.


아름답고 독특한 외관을 대충 훓어 보고 들어가는게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참을 밖에서 서성인다.







외관 감상을 열심히 한 후, 드디어 안으로!

 



성 설계도와 가운데에는 가우디.


입구에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안 쪽으로 더 들어가자니 입장료를 내란다. 우헬. 이게 무슨.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이리 저리 기웃거리던 중에 마침 케이티가 밖으로 나온다.

어땠는지 소감을 물어보니, 반응이 시원치 않다. 유물 설명이 스페인어로만 되어 있어, 오래 구경하지 않고 금방 나온 것 같다.

내부가 어떤지 정말 궁금하지만, 해석 안되는 스페인어를 대강 보고 나오자니, 수박 겉핥기가 될 것 같고... 나중에 내가 스페인어를 잘할 때 다시 와야하나?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가우디 건축물을 맛 보았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입구에서 입장료 파는 아저씨에게 유로화 대신에 크리덴시알을 턱 하니 내민다.

"스탬프요!"





#앞으로 20km 더? 한번 해보지 뭐!

가우디의 성에서 나와 광장에서 내게 익숙한 빨간색 배낭과 노랑 머리의 군을 발견했다. 잠깐 숨 좀 돌릴 겸 군이 있는 벤치로 가서 배낭을 내려놓는다. 

"Lee,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거야?" 군이 묻는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Rabanal del Camino에 꼭 가고 싶거든요. 그곳에 수도승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미사를 하는 성당이 있대요. 그걸 듣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은 Rabanal까지 가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내일 갈까 생각중이에요. 오늘은 어디서 머물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제 원하는 알베르게에 닿기 위해 30km 이상 걸었는데, 오늘도 굳이 30km 씩 걸어서 Rabanal까지 갈 필요은 없어보인다. 체력적으로 에너지 소모도 크거니와, 우선은 서두를 이유도 없으니까. 

"밤마다 내가 기침을 심하게 해서 다른 순례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어디 괜찮은데 없을까. 알베르게 말고 조용히 있을 만한 펜션 같은데 말이야."

군이 밤에 기침때문에 순례자들의 숙면을 방해하는게 마음에 걸린가보다. 
혼자 휴식할 만한 좋은 장소? 음, 가만 있자.

순간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이 번뜩 떠오른다.
여행 오기 전에 읽었던 까미노 여행기에서 어떤 작가가 Rabanal에 순례자들을 위한 휴식장소가 있다고 했다. 보통 펜션도 아니고 해서, 순례자로서 푹 쉬기에 최적의 장소가 될 것 같다.

"군, 내가 책에서 봤는데 Rabanal에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이 있어요. 몸이 불편한 순례자가 편히 하루 이상 머물 수 있는 곳이에요. 거기 어떨까요? 그런데... 오늘 거기까지 가기에는 조금 멀어서..."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하지?"

"20km정도 더 걸어야 해요."

이미 11km 정도 걸어온 상태에서, 20km 더 간다는 것은 어쩌면 모험과 같다고 생각한다.
대개 늦어도 알베르게에 오후 3~ 4시경에 도착해서 쉬어왔기 때문에,
지금 Astorga에서 출발하여 Rabanal까지 거의 쉬지 않고 걷는다면, 아주 빠르면 오후 5시 무렵에 도착할테지만, 그 무렵이면 내가 묵고 싶은 Rabanal의 기부제 알베르게는 이미 만원일 것이다.
열심히 걸어 도착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 머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 Rabanal까지 간다면 지금 당장 가야한다. 그것은 곧 Astorga를 더 구경하지 못하며 떠나야함을 동시에 의미한다. 우선은 목적지 신경쓰지 않고 이 마을을 마음껏 돌아보고 싶은 욕심이 적지 않다.

Astorga를 더 구경하고픈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Rabanal까지 걷기에는 무리일 것이라는 나의 걱정과 우려를 늘어놓으니 군이 말한다.

"Why not? 왜 안되겠어. 한번 가보지 뭐."

나의 어떤 말이 군의 마음을 동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Rabanal까지 가고자 마음의 준비를 벌써 끝낸 것 같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응과 빠른 결정에 놀란다. 한번 Rabanal까지 가기로 결심했으니, 군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사람일 것 같은데다 그녀가 이런 결정을 하게 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함께 Rabanal까지 가야만 내 마음이 편하겠지.

참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Astorga와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게 무척 아쉽지만, 그렇다고 Rabanal 까지 군 혼자서 가게 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지. 굿바이, 아스또르가Astorga.

조금은 걱정되는 여정이지만,
"왜 안되겠어?" 라는 군의 말처럼, 안 될 건 없으니까.
그래, 한번 해보자!

"좋아요!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으니까요."

그렇게 군과 나는,
함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모험에 앞서 군이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자고 해서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다. 
늦어도 오후 6시 전에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여기를 서둘러 떠나야 하는데 아쉬운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초콜렛 박물관과 대성당에 발도 못 내밀어본 것이다.

군은 별로 상관없어할 것 같았으나, 내 마음이 급하여 두 장소 중 하나를 골라 군에게 같이 가자며 제안했다. 그것은 바로, 초콜렛 박물관!
군과 나는 길을 물어 초콜렛 박물관을 찾아갔다.


Museo del Chocolate 초콜렛 박물관 외관


초콜렛 색깔의 작은 건물, 생각보다 조그마한 박물관이다.
초콜렛의 여러 종류라든지, 맛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인줄 알았는데 눈 앞에 전시된 것을 보고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군도 실망하는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직원에게 물어본다.
이곳은 초콜렛 만드는 방법과 초콜렛의 역사, 초콜렛 만드는 기계들이 있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있지는 않았다. 영어로 설명된 표지판도 없고 해서, 미련없이 밖으로 나온다.

성당 구경도 하고 싶지만, 그렇기에는 시간을 많이 뺏길 것 같아 꾹 참는다. 뭐,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그때는 꼭 여기, 아스또르가에서 머물며 실컷 구경해야지~


'여기 다시 찾아오겠어!' 마음 먹으며 어설프게 성당 사진을 찍는다. 아쉽지만, 난 이만.




군이 알베르게 화장실 이용하자고 해서 알베르게를 찾아왔다. 아까 대성당 광장에서 만난 케이티가 이 알베르게를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카우보이 모자 쓰고 있던 미국인 남자와 걷는 걸 아침에 보았었는데,
잘 걷는 그녀가 왠일인지 오늘 여기에 묵을 거란다.
눈치를 보니, '카우보이 모자'와 걷기 싫은 것 같기도 하고..
하긴, 그 남자. 정말 수다스럽긴 하던데, 케이티가 수다 떠는데 지쳤나?


지붕의 창문! 좋다. ㅎㅎ


 



#라바날Rabanal 로 향하는 길 위에서

금방 떠나기 아쉬운 Astroga를 뒤로한 채 군과 함께 걷는 까미노.
Astorga를 어느 정도 벗어났을 무렵, 횡단 보도에 다다랗을 때 낯익은 순례자 한 명을 발견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군(왼쪽)과 로빈(오른쪽)


Terradillos에서 내게 한국말로 인사했던 미국인 순례자, 로빈!  그 곳에서 만난 이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파파라쨔'(파파라치) 그들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다. ^^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쉬고 있는 빅토리오 부부님과 마리 아주머니는 건너편에서 걷고 있는 나를 보더니, "파파라쨔~" 라며 반갑게 인사해주신다.





세 번째 코피가 난 건 다음 마을에서 쉴 때였다.

아까 횡단보도에서 만났던 로빈이 벌써 다음 마을에 도착해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군과 나는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다. 군과 나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는 서로 번갈아 가며 화장실 이용할 계획이다.
로빈과 군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이놈의 코에서 또 코피가 난다. 킁!!
"물을 많이 마셔. 그러면 괜찮아질거야."  로빈이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물을 꿀꺽꿀꺽.
코피가 많이는 안 나서 휴지로 콧구멍을 막았다. 다행히 코피가 금방 그친다.
로빈이 만찬을 즐기도록 인사를 하고, 군과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하루에 코피가 세번씩이나.
나 이대로 라바날까지 걸어가도 괜찮을까?



#아름다운 길과 아름다운 사람들


Ciao!


군과 걷는 중에 뒤에서 까미노 친구들이 오고 있는 걸 알아챘다.
빅토리오부부, 마리아주머니, 나와 인연이 깊은 한국 부부님까지.
이름은 모르지만 향기가 진한 노란색 꽃들을 사이에 두고 걷는 햐안색 모래밭 길.
앞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이들과 함께 걷는 길이 너무도 좋다.



까미노에서 친구들에게 한국 트로트를 불러주기 위해 가사를 적어오신 박진순님.
까미노 친구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며 당신의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하신다.


빅토리오씨~


길 위에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남이 이어지는 순례자의 길.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우연히 친구들을 길에서 만나 어울려 걷는 이 장면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은
생에 두 번 다시 같을 수 없는 현재다.

사람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이 길에 감사하고,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 고맙다.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허공에 이미 흩어져버린 웃음소리와 지나간 발걸음을 붙잡을 수 없으니
순간의 찰나와 변화무쌍함은 벌써 과거를 그립게 한다.

이 순간과 감정을 두고두고 그리워하기 위하여, 길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을 찍느라 친구들과 간격이 멀어졌다. 뒷모습만 담기가 싫어 거의 뛰다시피 걸어서 맨 앞으로 왔다.





#코피? 별일 아닐거야.

머지않아 도착한 마을 Santa Catalina de Somoza 에 어르신들은 배낭을 풀고,
군과 나는 알베르게 화장실을 이용할 겸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새로 개장한 것 같은 Santa Catalina de Somoza 알베르게.



알베르게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오렌지를 먹고 난 후, 화장실에 왔는데
글쎄 또 코피가 나온다. 아흑...  
한 두번도 아니고, 이번이 네 번째.
아, 나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린건가? 괜시리 두려운 나머지 울상을 짓는다.
남들 보이는 데서 코피 안 나고 화장실에서 터져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누가 볼까봐 서둘려 마무리해서 밖으로 나온다.

"군, 저 또 코피 흘렸어요."

하루에 이렇게 코피를 흘리다니. 나 괜찮은걸까?
설마 라바날에 도착해서는 쓰러지는 거 아니야...? 아악~
근심 걱정이 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군이 말한다.

"Lee,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코피 나는 건 위험한 게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위안이 된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아온 그녀의 경험담이 진리라 여기며, 괜찮을거라며 스스로 달래어본다.

'그래, 군의 말대로 별일 아닐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까미노 친구들(어르신들)이 머무는 이 알베르게가 꽤 쾌적하고 편안해보여, 오늘 여기서 머물까? 순간 유혹이 동했지만, 이대로 라바날Rabanal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스또르가Astorga는 왜 떠나왔나.
후회하지 않을려면 무조건 라바날까지 고고씽해야한다. 아무렴.

태양이 달구고 있는 길 위의 모래들이 더욱 더 노랗게 보인다. 갈수록 메말라질 길 위로 이제 나설 차례다. 라바날까지, 약 12km 남았다.



#I'm crazy about the Camino!!


"Keep drinking, Lee."
길을 걷는 중에 군은  내게 자주 물을 마시며 권한다.

나는 물통을 배낭 옆구리에 넣고 다니는데, 군은 물이 담긴 용기를 배낭 안쪽에 넣는 곳이 있어서 튜브만 밖으로 빼내어 물을 마실 수 있다. 물이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 따뜻하게 데워지지 않고, 편리하게 마실 수 있다. 누구나 군이 물 마시는 것을 보면 부러워할 것이다.

혼자 걸을 때는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길에서 흔히 화장실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은 '자연' 의 화장실을 이용하긴 하지만, 대개 길 가의 바에 들어가 잠깐 쉬어갈 겸 화장실을 이용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자주 쉬어주고, 물도 자주 마셔야 한다. 지치지 않고 오래 걷기 위해서다. 

평소와 같다면, 지금쯤 나는 알베르게에서 이미 초스피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지친 다리를 편히 쉬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이 되면 그제서야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마을을 산책하겠지.

이틀 연속 30km 걷기.
그리고 코피가 하루에 네 번씩이나.
힘들고 지친다고 엄살 피울 법도 한데, 투정만 부리기엔 길이 너무도 아름답다. 

오늘 걷는 길은 점점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한낮의 더위를 그런대로 견딜만 하고,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서 그런지 몸이 늘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제와 달리 하늘에 듬성듬성 구름이 있으니, 그나마 그늘이 될 안식처도 충분하다.



아무리 길을 걸어가도, 앞서 걷는 사람, 뒤로 오는 사람 하나 없다. 오늘 새벽부터 걷기 순례자들은 대부분은 알베르게에서 혹은 마을 어딘가에 있는 바에서 편안한 휴식을 하고 있겠지.

군과 단둘이 걷는 이 길.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왠지 감기 걸릴 것 같은 쓸데없는 걱정도 해보지만, 
걷고 있어도 또 걷고 싶고,
지칠 때까지 걷고 싶은 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으니,
마냥 행복하다.

"군, 아침에 군이 커피에 대해 말한 것처럼, 
난 까미노가 정말 좋아요. 
I love Camino.
I think I'm crazy about the Camino!"





#바람이 가득한 작은 마을, El Ganso에 도착하다

 
여기서 Rabanal까지는 7km 남았다.
길 가까이에 작은 알베르게를 발견하고는 어김없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군과 나.



(알베르게의 아담한 식기도구, 주방이 깜찍하고, 작은 공간에 있는 침대도 나름 매력적이라는. 화장실은 아래 왼쪽 사진에 주황색 커튼 뒤에 있다. 아, 이런 화장실도 물론 매력적인 것중 하나다. ^^; )




참 오래된 마을. 사람의 새로운 흔적보다는 오랜 자취가 묻어나오는 곳.


이곳에서 사는 사람보다 이미 떠나간 이가 더 많을 것 같은 마을, El Ganso. 군데군데 허물어진 집들과 텅 빈 길을 바람이 가득 채워주고 있다. 

마을을 막 벗어난 공터를 맞이하자,
잠깐 쉬어가자며 군이 제안한다.

"Lee, It's Orange time!"

(내가 오렌지를 즐겨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군이 오렌지를 좋아해서인지, 군은 Break time(휴식시간)을 Orange time 으로 바꾸어 말했다.)


가운데에 빨간색 통에 담긴 크림치즈. 군이 골랐다.


아까 슈퍼에서 샀던 크림치즈를 빵에다 발라먹으니 정말 맛있다. 내가 골랐다면 맛을 장담할 수 없었을텐데, 스페인어를 잘 아는 군이 골라서 그런지, 뭔지 몰라도 정말 잘 고른 것 같다. 이런걸 사다가 빵에다 발라먹어도 되는군!



저기 높은 산에 하얀 부분이 있다.

"군, 저게 설마 눈일까요?"
"응."

"말도 안돼."
"진짜일걸."



간식을 먹고 다시 출발하는 군과 나.
한 시간 반 정도만 더 걸어가면, 라바날에 닿을 수 있다.

어제도 오래 걷고, 오늘도 오래 걸으니..
이제 체력적으로도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군도 체력이 점점 바닥나는지 속도가 전과 같지 않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앞서 가는 순례자 2명을 따라잡았다. 내 나이또래의 순례자들 같은데, 그 중 한 명이 무척 괴로워하며 길을 걷자 친구가 부축하며 함께 걷고 있다. 이들은 오늘 어디에서부터 오는 길일까.



#드디어 라바날Rabanal에 도착하다!


라바날Rabanal에 도착했다는 표지판을 발견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이제 정말 조금만 더 걸어서 알베르게를 찾아보는 일만 남았다.

오후 내내 나보다 앞서 걷던 군의 속도가 아까와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챘지만, 라바날에 거의 다 와서는 더 느려졌다. 이젠 내가 앞장 서서 군을 이끌어간다.
조그만 오솔길 언덕에 들어서서는 자꾸 발을 헛딛는 그녀가 걱정되어 자주 뒤돌아보며 조심하라며 걱정해준다.

편히 쉴 곳을 찾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왔는데,
오히려 긴 여정이 군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되기 시작한다.

El Ganso. 거의 다 스러져가고 있는 마을을 지나와서 그런지, Rabanal도 별다를 게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주욱 늘어져 있는 사설 알베르게들을 보니 '억' 소리가 난다.
이미 마을에 도착하여 쉬고 있는 순례자들이 그늘아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우리를 맞이한다.

순례자협회에서 하는 알베르게를 찾아야 순례자들의 휴식의 집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열심히 두리번 거리며 알베르게 이름을 살펴본다. 그런데 내가 찾고 있는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는다.
내 발걸음은 더 조급해지고 군과의 간격은 더 멀어진다.

'어딘가 있을거야.'
확신하며 찾다보니 결국은 길가에 있는 알베르게는 모두 다 지나쳤다.
이제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현지인들의 집이 있을 언덕길이다.

군이 뒤에서 말한다.

"Lee, 내 생각에는 그냥 다른데서 묵어도 될 것 같아."

그래도 이곳에 온 목적이 그냥 사설 알베르게에 머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기부제 알베르게를 찾아서,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이 어디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더이상 알베르게 비슷한 건물은 없고 그저 작은 집들만 있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쉽게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경사진 곳까지 다다른다.

'알베르게 같은 곳이 보이질 않네...'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허무감이 밀려드는 찰나.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문이 열려진 집이 하나 있다.
벽 한쪽에 뭔가 쓰여져있는데 잘 안 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은 그 쪽으로 옮긴다.

또렷이 보이는 글자.
내가 가진 알베르게 정보 종이를 확인하며, 군에게 소리친다.
"군, 이리 오세요!"

드디어 찾았다.
기부제 알베르게!



(알베르게 가우셀모.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마리아 성당 왼쪽에 있음. 런던과 비에르소에 본부를 둔 성 야고보 신자회가 운영한다. 헛간을 개조한 공간 2개의 방에 46개의 침대가 있다.)

알베르게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저녁을 먹고 있다. 그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호스피탈로를 찾아 묻는다.

"여기 침대 2개 있나요?"
"미안하지만 하나 밖에 없어요."

"안돼요, 침대 2개가 있어야해요."

어떻게 온 곳인데.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하고 있는데, 뒤늦게 온 군이 호스피탈로에게 정중히 묻는다.
"혹시 여기 매트리스 여분이 있나요.
침대는 없어도 되니 매트리스를 놓고 잘 수 있을까요?"

"사실은... 있어요. 서재가 있는데 거기다 매트리스를 놓고 주무셔도 될 것 같네요."

군과 호스피탈로가 이야기하는 사이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곳에 온 이유가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 을 물어보고, 군에게 안내해주기 위해서였음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매트리스가 있다는 호스피탈로의 말에 군은 이걸로 충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군, 내가 매트리스에서 잘게요."
"아니야, 네가 먼저 여기에 왔잖아. 그러니 침대는 네거지.
아무래도 서재에 혼자 있는 게 나한테 좋을 것 같아."

처음에 예상했던 곳 -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은 아니지만,
혼자 머물 수 있는 곳을 원했던 군에게 적합한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이 알베르게에 딱 하나 남은 침대에 찾아 짐을 내려놓는다. 내 침대라는 걸을 표시해놓기 위해 침낭을 펼쳐 놓고 나서야 한숨 돌리게 되었다. 군의 잠자리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 서재를 찾아 갔더니 꽤 넓은 방 한 켠에 매트리스 하나 놓여있다. 저녁에 혼자서 춥지 않을까 조금 염려가 된다.

아참, 오늘 성당에서 하는 미사에 꼭 참석해야하는데,
언제 하는지 궁금하여 호스피탈로를 찾아 물으니,

"지금!"
이라며 짧고 강하게 대답해준다.

헉!

"성당은 어디에 있죠?"
"알베르게 바로 맞은편에 있어요."

서둘러 군을 불러, 함께 성당에 간다.



(2001년 이곳에 설립된 산 살바도르 델 몬테 이라고 수도원의 베네딕트회 사제들과 오스트리아에 본부를 둔 상트 오틸리엔 대수도원이 제휴하여 저녁 예배를 오후 7시, 9시 반에 한다. 12세기 템플 기사단이 이곳에 등장했을 때 순례자들이 외딴 산지를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이미 미사에 참석하러 온 순례자들로 가득 찬 성당. 군과 나는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로 진행되는 미사.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를 엄숙함에,
이걸 사진으로 찍어, 말어, 몇 번을 망설이다 소심하게 셔터를 누른다.

낯선 공간과 낯선 언어, 소리가 빚어내는 순간에서 평안함을 얻는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조급했던 마음과 걱정이 이제야 사그러드는 것 같다.

미사가 끝나고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난다.

"Lee, 정말 굉장한 미사야. 고마워."

군이 오늘의 미사를 마음에 들어해서 참 다행이다.


성당 안 뒤쪽.


알베르게로 돌아와 이젠 저녁을 먹는 일만 남았다.
알베르게 주방엔 여러 팀의 순례자들이 음식을 만드는데 열중이라 북적거린다. 슈퍼를 찾기엔 시간이 늦었고, 내게 있는 수프를 끓여서 군과 함께 먹을 생각이다.

"군, 잠시만 기다려요. 수프가 몇 개 있어서... "

"Lee, 나 저녁 못 먹을 것 같아. 지금 쉬어야겠어."

피곤한 기색이 완연해보이는 군.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하지 않겠냐며 묻지만, 안타깝게도 군은 저녁 먹을 힘도 없어보인다.

군은 자신의 방으로 가고, 나는 건더기 몇 개 없는 수프와 빵으로 저녁을 먹는다.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쉬러간 군이 걱정되어 스프랑 빵이 모래알 씹는 것 마냥 느껴진다.

미적지근하게 저녁을 마치고, 
배낭에서 허브 티백를 하나를 꺼내와 뜨거운 물 컵에 담아 군이 있는 서재를 찾아간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먼저 내 뺨을 반긴다.
넓은 공간의 서재 한 구석에 매트리스를 놓고 그 위에 쉬고 있는 군.
오늘밤만큼은 군은 자신의 기침소리에 방해받을 다른 이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새벽에 홀로 있는 이 방이 무척이나 추울 것 같아 결국엔 군에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

허브차가 담긴 컵을 군에게 내민다.
"정말 고마워. 넌 정말 다정해."





성당과 알베르게 사진을 몇 장 찍고 방으로 올라와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는데, 옆 침대를 쓰는 순례자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다.

"넌 정말 운이 좋은거야."

마지막 하나 남은 침대를 차지한 내가, 정말 운이 좋은 건가?
내가 오기 전에 이 침대 하나를 두고 어떤 일들이 있었나?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샤워 후 침낭 속으로 눕히는 몸이 무겁다. 
하루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일찍 잠을 청한다.

그런데.

군,
군이 걱정된다.
찬 공기가 가득한 그 방에서, 홀로 잠을 잘 이룰수 있을까.

혹시 건강이 더 나빠지는 건 아닐까.
괜히 여기 오자고 그랬나.

오만가지 걱정을 하면서
난 두 손을 꼭 붙잡으며,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한다.



오늘의 코스!


Santibanez de Valdeiglesia - Astorga - Murias de Rechivaldo - Santa Catalina de Samoza - El Ganso - Rabanal del Camino = 32.1km


오늘의 지출!

바에서 꼴라까오, 빵 2.3유로 + 슈퍼에서 5.74유로 + 알베르게 기부금 3유로 = 11.04유로


오늘의 스탬프~




스스로와의 씨름 끝에 드디어, 정말 드디어 포스팅합니다!
포스팅 할 때마다 한결 수월해졌으면 좋겠는데,
제 마음은 늘 천방지축이라 참 속을 썩입니다. 뭐, 다 괜찮아지겠지요. ㅎㅅㅎ;;


후에 군은 나와 함께 있는 중에 아는 친구를 만날 때마다 이 날을 회상하며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아무렴 이야기하는게 실제로 함께 걸었던 기분, 알베르게를 찾아간 상황까지 모조리 잘 알려줄 순 없지만,
제게 이 날의 여정이 무척 기억에 남는 것처럼, 군에게도 특별한 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
여행을 하던 중에도, 여행을 마친 후에도. 가끔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 중얼거리는 주문과도 같은 말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자주 되새겨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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