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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15] 순례 13일째, 언덕 위에 홀로 서서②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15] 순례 13일째, 언덕 위에 홀로 서서②

Yildiz 2009. 8. 4. 22:25


2008년 6월 5일 목요일

 
It's raining now
보슬 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연두색 판쵸우의를 입고 짜잔! 변신!

 


계속해서 이어지는 걷기 좋은 길... 이지만, '우와, 이런 곳도 있구나!' 감탄과 함께 반복되는 비슷한 풍경에 대한 지루함도 조금씩 밀려온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선명하게 보였을 아름다운 자연이지만... 만약 지금 햇볕이 쨍~ 내려쬐고 있다면? 무자비한 태양 아래, 한 뼘짜리 그늘도 없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산 중에 마을은 커녕, 나무 그늘 찾기 어렵다. '자연' 에서 급한 볼 일을 봐야했다면, 오늘은 참 난감한 날이 되었을 것 같다. ;)  


혼자 걷기가 적적해질 무렵, 이른 아침에 연출되었던, 프랑스 아주머니의 '자켓 임자를 찾아 삼만리' 주인공들을 만났다. 한번도 말을 붙여보지 않은 외국인 부부. 푸근한 인상을 가진 두 부부에게 호기심이 일어 말을 건넨다.

이탈리아에서 온 부부. 빅토리오, 피아.


이 분들이 어디서 오셨는지 궁금했던 참인데, 부부도 나에 대해서 궁금했었나보다. 젊은 사람이 그것도 동양에서 온 여자가 혼자서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분 성함은 '빅토리오(Vittorio)', 아내분 성함은 '피아(Pia)' 이시다.

"어디서 오셨어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왔단다. 너는 일본에서 왔니?"
"아니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내분께서 영어를 잘 못하셔서, 내가 말을 마치면 남편이 아내에게 통역해주었다. 

밀라노.... 에 대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축구선수 세브첸코가 AC 밀란을 떠나 첼시로 이적했다는 것, 잘 생긴 축구 선수 카카가 여전히 뛰고 있는 팀이 'AC 밀란' 이라는 것뿐. (현재 세브첸코와 카카는 AC 밀란에 없지요~ )
하지만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기 위하여, 밀란에 대해서 아는 '척' 좀 해야겠다.


"오, 밀란에서 오셨다면 AC 밀란!!!!" 라고 말했으나, 잘 못 들으신 건지 아니면 내가 잘 못 어필한건지 다른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순간 '그 밀란이 이 밀란이 아닌가?' 혼란스럽다. 
자연스럽게 세브첸코와 카카에 대해서 대화가 오가기를 기대했는데 이야기 흐름이 끊겼다. 헛 ㅠㅅ ㅠ


"몇 살이니?"
"22살이요." (외국에선 한 살 어리게 말해도 되니 좋다.>ㅅ <!)

오, 한창 좋을 때네, 뭐 이런 반응.
"그럼 지금 학생인가보구나. 지금 방학이라서 온거니?"
"아니요. 대학교를 1년 휴학하고, 여행을 막 시작했어요." 

프랑스 파리로 들어와 난생 처음 유럽 땅을 밟아보고, 까미노 순례를 마치고 유럽 여행을 한 뒤 터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후에 동남아시아도 여행할 계획이라고 말하자 두분 모두 놀라신다. 부모님이 부자냐고 물어보시는 빅토리오.

"아니에요.부모님이 부자는 아니구요. 여행 가려고 제가 아르바이트 하면서 돈을 모으고, 부모님께서 어느 정도 지원해주셨어요. 부자여야만 여행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

까미노 순례가 처음인지 내가 묻자, '그렇다' 고 대답하시는 빅토리오.
"TV를 통해서 순례자의 길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보았지. 그리고 이 곳을 이미 다녀간 친구들에게서 이야기도 들었어."
"그럼 지금 까미노 순례를 하는 심정은 어떠세요?"

얼굴을 찡그리며 말도 마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 빅토리오.
 "어후, 정말 힘들어."
 "이번이 생애 첫 '까미노'이자 마지막이 될거야!" 라고 웃으면서 진지하게 말하신다.

"저는 나중에 또 올 거에요! 까미노는 정말 특별한 것 같아요. 다양한 나라에 온 순례자들을 길 위에서 만날 수 있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걸으면서 여행하는데다, 알베르게에 묵는 숙박비도 싸구요. 저렴하게 오랫동안 여행할 수 있잖아요."

"그야 너는 젊으니까. 우린 늙은이들이야." 라고 말하며 크게 웃는 빅토리오.
난 그저 웃으며 어깨를 머쓱거렸다.

"종교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거니?"
"아니요, 저는 종교가 없어요. 과거에는 까미노가 종교를 더 강하게 하는 길이었지만, 요즘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잖아요. 혹시 작가 '파울로 코엘료' 를 아세요? 그가 이 길을 걷는 도중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걸 알고는 저도 꼭 여기에 오고 싶었어요. 제 인생을 돌아보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 말이죠."

"오, 그거 좋구나."
"그럼 까미노는 어떻게 알게 됐어?"

"2년 전에 이 곳을 다녀간 한국인 여행자가 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까미노 여행기 덕분에 몇 년 사이에 한국 사람들도 까미노의 존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구요."
 "오늘은 어디까지 가세요?"

"온타나스, 너는?"
"저는 산볼에 갈 거에요. 거기에는 히피가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요!"

"산볼? 거기가 어딘데?"
"온타나스 가기 전 5km 전쯤에 있어요. 12명정도만 머물 수 있는 곳이라 서둘러야 해요."
"그래, 빨리 가봐라."

와인을 마시면 영어를 더 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빅토리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잘 웃는 피아 아주머니. 모두 유쾌하신 분들이다. 다음에 만나길 기약하면서 앞서서 길을 나아간다.


오른쪽에 새 모양의 형상. 작은 것에도 기쁘고 감동 받게 되는 길.



☹         
            Welcome to the Hell.  ☹    
.
 
얼마쯤 온 걸까. San bol까지 가려면 얼마나 남은 걸까.



노란색 화살표, 조가비 모양, 하얀색 바탕의 이정표를 발견했지만, San bol 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아직은 더 가야하다보다.

평평하고 무난한 길을 내내 걷다가... 
어라,
갑자기 쌩뚱맞는 길에 들어섰다.

한 발 떼어 앞으로 내밀기 위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흙이 끈적끈적해 신발 바닥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어이쿠.  
길이 왜 이렇게 다른걸까? 아까 걷던 길 위의 흙과 뭐가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발에 흙 덜 묻히기 위해서 무거운 배낭 메고 뛰어 갈 수는 없는 일이고,
무협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쓰는..
그 뭐더라.
축지법!

그런 기술일랑 있으면 좋겠구만. 하하하 ;;

에휴...
다시금 현실 직시.

나는 진흙탕 길 위를 번쩍번쩍 날아다닐 한비광 같은 위인이 아니올시다. 
(한비광은 만화 '열혈강호' 에 나오는 주인공이에요. ㅋ )

갈수록 땅에서 발을 떼는데 힘이 더더욱 들어간다.
양쪽 발목에 몇 키로그램의 모래주머니를 묶어놓은 것만 같다. 

아주 그냥... 날 죽이는 구나.  
발목이 시큼시큼 아파온다.

사진으로 보니 흙들이 내숭떨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론 정말 고약했다. (나만 그랬으려나 ㅠ)


감히 어디에 엉덩이 부비댈 수 없는 고약한 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2가지다.

길 한 구석에 서서 망부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현재 서 있는 시점으론 보이지 않는 저 경계선 너머에,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희망을 갖는 것.
  

'조금만 더 가면 다시 좋은 길이 나오겠지' 
주문을 외우며 힘겹게 도달한 길의 끝에서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후욱- "

나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어김없이 이어져 있는 같은 길.
뭔가 끝이 보이려나 했던 기대가 보란 듯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또다시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한 번 희망을 품고 내딛는 발걸음.
'지금 보이는 이 길 끝에 닿게 되면, 혹시 좋은 길이 나올 지도 몰라. 어쩜 산볼에 가까이 왔다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이라는 이름의 희망 품기와
품었던 희망을 한숨 섞여 내뱉기
다시 숨을 들이쉬며 품어버리는 지독한 희망에의 호흡.

지긋지긋하게 이어지고 있는 길은
어서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쉽게 놓아줄 생각은 커녕, 독하다. 

신발 바닥에 흙이 자꾸 더해져서 가는 발걸음을 점점 무겁게 만드므로, 
잠깐 멈춰서 신발에 흙을 떼어내는 동작을 계속 하게 된다.  
큼지막한 돌이 보이면 신발을 비벼 흙덩어리를 덜어내거나, 
서 있는 채로 오른쪽 신발 옆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흙을 왼쪽 신발 귀퉁이로 떼어내고,
반대로 왼쪽 신발의 흙덩이를 오른쪽 신발 귀퉁이로 제거하고...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멈춰서서
신발에 흙 떼어내고,
떼어내고...

이러기를 반복하다보니, 금방 지쳐버렸다.
한숨을 쉬며, 잠시 멈춰섰다.
고개를 들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아까와는 달리 내 뒤로 오고 있는 순례자들이 부쩍 늘었다.
나를 지나쳐 앞서 가는 순례자들이 늘어날수록 왠지 더 힘 빠지는 기분이다.

나는 나름 열심히 걷는다고 걷고 있는데,
속도가 붙기는 커녕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고,
내가 힘들게 걷는 것에 비해 다른 순례자들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고,
게다가 나처럼 신발에 붙은 흙을 제거하는 군더더기 노력 없이 잘들 가는 것 같다.
다른 순례자들의 신발을 보니 나처럼 흙덩이가 잔뜩 붙어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 정말 못 참겠다!!!!!!
나만 이렇게 힘들게 걷는 걸까? 
힘들어 죽겠다,
이제까지 걸어본 길 중에서 가장 최악이야! 아휴!

모든 게 다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풀을 밟으면 좀 더 나을까 싶어 길 가를 걷기도 하고, 물이 고여 있는 길을 피하기도 하고,
저 쪽 땅은 좀 더 나으려나 싶어 저기 밟았다, 다시 저~ 쪽으로 가고,
쉽게 가려고 신경을 곧두세우고 고민하며 걷지만
오히려 길 위에서 헤매고 있다. 

"넌... 넌 도대체 누구냐... " 쉽지 않았던 길.


경치가 좋든 말든 간에, 어서 끝났으면 하는 길.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왼쪽으로 갈림길이 하나 있다. 
길만 보일 뿐, 작은 집일랑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설령, 왼쪽으로 빠지는 길이 "San bol" 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어제부터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꼭 가고 싶었던 목적지, "San bol" 이지만,

순간의 망설임 없이... San bol 을 포기 하고, 앞으로 나 있는 길을 걷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집시들의 밤을 순례자들과 함께 보내는...
어두운 밤을 몰아낼 모닥불 파티 따윈 이젠 안중에도 없다.

지금은 어서 이 끔찍한 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내일 아침에도 이 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아, 상상일랑 하지 말자.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이젠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 없다.
이 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만
당장은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이 길.
힘들다고 내뱉을 수록 심연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 누가 말했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고.

갑자기 머릿 속을 스치는 명언.

그래...
여길 헤엄쳐 갈 수도
날아갈 수도 없는 거라면
힘들고 어쩡쩡하게 걷는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마음 편히 걷자.

못난 길바닥은 그만 쳐다보고,
내 뒤로 오던 순례자들은 모두 앞서 갔겠다, 
근방엔 아무도 없으니, 소리 높여 노래나 불러 볼까나.

비가 내리고, 무대는 진흙탕에 
조명은 탁하고 연한 회색빛,
관객은 길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풀들 뿐.

보잘것 없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부터 여기는 나만의 콘서트장이다. 헤헤.

나의 애창곡인 가수 조성모의 노래 'For you' 를 시작으로 해서 
나윤권의 '나였으면' ,
여름 농활 때 논에서 피사리를 하며 즐겨 불렀던
'바로 그 한사람이' 를 불렀다.

그리고 그 다음 곡으로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 를 부르기 시작했다. 

♪♬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께 많이 아파도 웃을꺼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하지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있을 때 커보이는 걸~

힘이 들땐 하늘을 봐아- 


이 대목에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멈췄다.
그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애꿎은 물방울만 쏟아내리는 하늘.
연한 회색에 찡그린 듯한 표정의 하늘이지만, 
그의 넓은 품에 잠시 숙연해진다.  

눈물 찔끔 훔치고
다시 이어 부르는 노래,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그래... 언젠가는 이 힘든 길도 끝나겠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팍팍 와닿는다.

캬,
진정 오늘의 주제곡이구나.
그려, 다시 앵콜!!!


힘이 들땐 하늘을 봐아-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몇 분 전만 해도
한 걸음 내딛기가 고역이었는데,
노래부르는데 집중하다보니 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노래로 한 시름 달래다보니 시간도 아까보다 잘 가는 것 같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몸은 힘들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얼마 좀 더 갔을까.

마을 성당의 십자가와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드디어!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알베르게는 이미 만원이라 근처의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식당과 알베르게를 겸용하는 곳이라 1층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순례자들이 몰고 온 흙과 빗물로 바닥은 정신 없었다. 크리덴시알에 스탬프를 받고, 직원이 안내해주는 방으로 올라갔다. 4개의 이층 침대가 있는 방에는 박진순, 신경희 부부님, 아침에 잠시 동안 함께 걸었던 프랑스 아주머니, 루이스 그리고 마가렛이 나를 맞아주었다!
빗 속에서 힘들게 몸을 끌고와 오만 진상 지으며 '힘들었다' 고 투정 부릴 법도 한데,
까미노 친구들을 보니 언제 힘들었냐는 둥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1층 침대에서 자고 싶었지만, 이 방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손님이라 2층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배낭을 바닥에 놓고 우선 편히 쉬고 싶어 침대로 올라가는데... 어후. 발바닥이 찡 하니 아프다.

오늘밤, 내 옆 침대의 주인공은 루이스!
배낭에 있는 짐을 모두 꺼내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뭘 찾는 걸까.

흰색 봉지를 찾더니 갑자기 손을 흔들며 춤을 추는 루이스.



나름 '삼바' 라고 추는 춤인데,
 쌩뚱 맞아서 배꼽 잡고 웃었다. 히히히.





샤워하고 방으로 들어서는 데, 프랑스 아주머니와 신경희 아주머니께서 이야기하고 계신다.
신경희님께선 불어를 하실 줄 알아서 아주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보고 계시는 중이셨다. 
"어머나, 이 분은 프랑스 북부 쪽에서 사시는데, 집에서부터 걸어오셨대. 그럼 이미 천 킬로미터 정도 걸어오신거네. " 

이 얘기를 듣곤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아주머닌 몇 주 전부터 계속 걸어오신 게 아닌가? 
오랜 여정에 지칠 법도 한데, 걷는 모습이 '날라다니는' 것 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아주머니의 체력. 참 대단하시다!! 
신경희님 덕분에 아주머니 성함도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 성함은 "숀탈"
(아주머니 성함을 알게 되었지만, "메르시 보꾸" 아주머니라고 부르는게 더 좋았다. ;) ) 
숀탈 아주머니의 크리덴시알에는 정말 많은 스탬프들이 찍혀있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세요!" 
 
수줍은 듯 웃는 숀탈 아주머니. 


고단했던 하루였던지라 침대에 침낭을 펴고 낮잠을 청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 질 줄 알았는데
목이 아프고, 열도 좀 나는 것 같다. 감기 들면 안 될텐데... 
좀 더 잘까 하다가 밤에 잘 자기 위해서는 이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내리쬐고 있다.  
마실 한번 해야겠다싶어 카메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따뜻한 음료로 목을 축이기 위해 바에서 코코아 한 잔을 시켜 프랑스 부부와 합석하여 홀짝홀짝 마셨다. 까미노를 걷는 많은 노부부, 중년 부부들이 있지만, 항상 아내보다 앞질러 걷는 남편. 그런 남편을 힘겹게 쫓아가는 듯한 아내. 이 부부, 나름 유별나다.



서로 소통은 잘 안되지만,
안부를 묻는 건 빼놓지 않는다.

불어 특유의 부드러운 발음으로 "Saba~ ?" 물어봐주시는 아주머니.

☀The sun
        Never goes away!

오... 밖으로 나오니, 그야말로 화창한 날씨.
잔뜩 흐린 구름만이 가득차 있던 몇 시간 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샌달을 신고 나왔다가, 아까 그 언덕에 다시 올라가볼 생각으로
등산화를 갈아 신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느 골목 귀퉁이를 돌아 언덕으로 향하려는 데, 개 한 마리가 주인집 대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있다.
차마 못 지나가겠다 싶어 다른 길로 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아까 길에서 만났던 빅토리오다. 그리고 옆에는 마놀로 부부도 함께.

"왜 산볼은 안가고 여기 왔어?" 라고 묻는 빅토리오.
뭐라 답하기엔 사연이 길어
나는 그저 멋쩍어 웃어보였다.

마놀로 부부(스페인)와 빅토리오(이탈리아). 나중에 알고보니 사돈지간.



도시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 마을.
한바퀴 돌아볼 것도 없이 아주 작은 마을이다.
저녁 먹기 전에 언덕 올라가는 데 힘을 쓰자 싶어
바로 언덕으로 향한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시치미 떼는 변덕스런 아가씨 같은 날씨.
하늘에 걸려 있는 조각 구름이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정말 힘겹게 걸어온 길,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어떤 모습일까. 

고행길을 걸은 터라 발이 아팠지만, 무리가 가지 않게 천천히 걸어 올랐다.  
찐득찐득한 흙의 성질은 여전하다. 


하나 둘씩,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광경.

이윽고 터뜨리게 되는 탄성.

우와...

정말 아름답다...!




여기가 아까 거기 맞아?!

우와....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 구름이 동동 떠다닌다.

비와 구름이 가고 난 이 곳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풀들.

바람에 풀들이 하나둘씩 허리를 뒤로 젖혀 연두빛 바다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어디에 숨어 노래를 부르는지
새들의 경쾌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혹시 늦은 걸음으로 순례자가 오고 있진 않는 지 길 너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없다.

마음껏 소리 질러야지~

아아아~~~!!!

눈물 겹도록 아름답다,
진짜 진짜 아름답다,

정말 멋져~!!
 



내 작고 작은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무한한 빛으로 세상을 감싸는 태양을 마주 본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언덕 위에서
 쏟아 내리는 햇살을 받으며

나홀로 서 있다.
 

아, 지금 이순간
내가 이렇게
숨쉬며 살아있구나.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이 자리에 서 있구나.

삶, 그리고
인간의 삶을 허락하는 자연,
거대한 우주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두 손 모아 내 마음을 전한다.





You make
me smile..


미칠 듯이 행복에 겨운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셀카를 마구 찍어댄다.

힘든 시간을
때론 투정과
한숨

희망 품기와
눈물 한 방울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도달한 이 길에 서서

활짝 웃어본다.



여러 장을 찍은 끝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사진 한 장 건졌다.



해와 바람을 마주하며 미소 짓는 내 모습.

"나중에 또 오늘과 같은 길을 걷게 되거든, 
언젠가 다시 햇살이 나를 비출거니
힘들어도 포기하지마.
지금 그 자리에서 웃어봐. " 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아아-
까미노는 우리네 인생과 같지 않을까.
길고도 짧은 인생을 그대로 녹여놓은 길.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힘겨운 일들이 
오늘 걸은 진흙탕 길의 여정과 같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진흙탕 길에 옷은 다 젖지, 신발은 물 웅덩이에 빠져 더러워지지,
편히 쉴 곳 없는,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상황을
누구나 한번 쯤은 겪겠지.

힘들다고 욕을 배설하고,
세상의 불공평에 삿대질을 하고
행복이란 말은 무색해지는 암울한 시간들.  

허나,
비와 바람은 대기의 흐름을 따라 제 갈길을 가고,
지리멸렬한 긴 고통의 시간들은
어둠을 물리치며 등장한 태양의 입김에
스르르 사라지고,
얼었던 대지는 데워진다. 
  
그 따스한 햇살에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도
다시금 온기를 되찾는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비와 구름이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행복은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손가락, 발가락 끝에서 피어 날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면

비바람 몰아치는 와중에도
보란 듯이 웃어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
삶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



이제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다.
서두를 것 없이 모두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다.

밝게 웃으며 맑은 빛을 고스란히 내게 보내는 해에게.
풀잎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보듬어, 내 머릿결과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에게.
마실 나온 나를 반기며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하는 새들에게.

그리고
진흙탕 같았던 길에게도.

모두들,
안녕!


♪♬

언덕에서 내려 온 후, 간추린 이야기.

알베르게 들어가는 입구에서 같은 방에 묶는 남자애 둘과 신나게 수다 떠는 프랑스 여자애(부르고스 알베르게에서 자기 안방 전화인냥 공중전화기를 오래 사용했던) 가 있길래, 눈을 한번 흘겨주었고.

한국인 부부님과 루이스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마침 빈 테이블에 한 자리가 부족해 내가 다른 테이블로 가게 되서 조금 삐쳤었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브라질 청년 덕분에 스페인 요리를 시킬 수 있었고, 모국어인 포르투갈어에다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하는 젊은이를 보곤 엄청 부러웠고.

후식으로 시킨 푸딩!!! 가게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푸딩은(바나나 푸딩이었던가...)
정말 환상적이었다는 거. 다음에 또 온타나스에 오게 된다면
순전히 이 푸딩 때문이다. 히히 : )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타나스의 밤은 너무너무 추웠다.


 
오늘의 코스~ >_ <!
 

Burgos - Villalba de Burgos - Tardajos - Hornillos del Camino - Hontanas = 30.6km




 


오늘의 지출!


숙소 5유로, 도넛 0.96유로, 치즈 0.9유로, 코코아 1.2 유로, 저녁 6유로, 버터와 잼 ?? 유로 = 14.05 + ?? 유로


오늘 받은 스탬프~!ㅅ !






안녕하세요!!! 일디즈입니당 ㅎㅅㅎ. 꺄아. 맑은 하늘의 온타나스 언덕.(정확히 말하면 '온타나스' 가는 길의 언덕 이랄까요. ㅋ)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제가 최대한 서둘러 글을 쓰려고 했으나... 이 때 감흥 그대로 글을 쓰자니 참 어렵더라구요. 왜냐...  여유도 없고, 마음만 고속도로 타고 있고, 입에는 투정만 달고 있는데 철면피를 깔고 "아~ 정말 아름다웠어요~ ." 라고 쓰기엔 스스로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했달까요. 지금은... 현재 순간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중입니다. 
삶의 어느 지점에 있든지 간에, 모두들 힘내세요! 지칠 땐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건 어때요? 아님 셀카를 찍어보세요. 전 가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셀카를 찍어 제 얼굴을 봅니다. 무뚝뚝하고 화가 난 표정을 발견하곤 억지로라도 웃어서 다시 사진을 찍곤 해요. 이렇게 못 생기게 표정이 굳으면 안되지~ 하는 심보로 말이죠. ㅎㅎ (사실 조금씩 생기는 눈가의 주름을 보곤 덜컥 놀라기도 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지금 걷고 있는 길 위에서 자주 웃고, 노래하며 순간을 즐깁시다!!!! 라는 제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는데,,, 어찌 그렇게 잘 됐는지 모르겄네용. ; )


끝으로,  류시화씨가 엮은「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서 시 하나 옮겨 적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 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_랜터 윌슨 스미스


가끔 중얼거리면 좋을 그런 주문입니다.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

그럼 다음에 또 뵈요. 여름 휴가 잘 보내세요~ ㅎㅅ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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