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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11] 순례 10일째, 잊지 못할 빠에야 그리고... 본문
조그마한 또산또스와 알베르게 2008년 6월 2일 월요일
여느때와 달리 일찍 일어나기 싫은 오늘. 천천히 출발하려는데, 루이스가 자꾸 안 가냐고 재촉한다.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에 호스피탈로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다.
"Muchas gracias!"
"Buen Camino"
순례를 잘하라는 호스피탈로의 답변을 뒤로한 채 길에 오른다.
어제에 이어 날은 개지 않고 흐리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다.
루이스는 내 연두색 우비를 좋아한다. 자기껀 우중충한 어두운 색인데 내 건 밝은색이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루이스는 내가 사진 찍는 걸 보곤 자꾸 자기 카메라를 주면서 찍어달라고 한다.
에이, 아침부터!! 그것도 한 두번이야지. 귀찮아!! 라고 말하고 싶지만, (;;)
제대로 얘기가 전달되지 않을게 뻔하므로, 그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을 삼킨다.
자꾸 사진에 나오고 싶어 하는 루이스. 얄밉지만 그렇다고 밉지만은 않은 친구다. ㅎㅎ
오늘은 길을 따라 어디에 가 닿게 될까. 날은 궂지만 푸르른 색으로 뒤덮인 대지가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인다.
훤히 내다보이는 길 위에 우비를 쓰고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나보다 일찍 출발한 노라, 왠일인지 가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고 있다.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니 노라 왈,
"샌달을 알베르게에 놓고 왔지 뭐야. 새로 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겐 중요한 게 되어서 그거 없음 안될 거 같아. 다시 가지러 가는 중이야."
헐... 이미 30분도 넘게 걸은 길인데, 다시 가자니 고역이겠다. 거기다가 왔다갔다 1시간이나 더 걸린다. 갈 길이 바쁜 노라를 붙잡아 놓고, 루이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열흘간 순례길을 걸으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순간을 놓치지 말자는 것.
혹시 이번이 노라를 만나는 마지막이 될지 누가 알겠나? 바쁜 노라를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사진을 찍자고 부탁했다.
노라에게 조심히 오라고 인사를 하고 배웅했다.
루이스는 나보다 빨리 걷는 편이여서, 내가 느릿느릿 걸어서 같이 걷기 힘들겠다 생각했는지 저 멀리 가버린다. 루이스는 오늘 내가 걷는 것보다 2배는 걸을 계획이여서 길을 재촉했나보다.
그라뇽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평화로움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걷는 길.
어느때보다 안정되고 편안한 호흡으로 한 걸음 한걸음을 내딛는다.
가끔씩 길을 걷다가 잠시 숨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방금전에 내가 걸었던 시공간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눈치채지 못했던 풍경을 혹시나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낯익은 이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뻬뻬 할아버지가 저기 걸어오고 계신다. ;)
"Buenos dias! Come esta usted?"
(좋은 아침이에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Muy bien!"
(아주 좋단다.)
오늘 처음 들어선 마을. 어느 때 보아도 기분 좋은 노란색 표지.
게다가 "산티아고까지 576km" 라는 친절한 표지도 함께 있다.
마놀로씨의 부인, 성함이 가물가물.. ;;
순례를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분법이 적용되는 것 같다.
순례길에 필요한 것과 필요없는 것.
순례자 혹은 순례자가 아닌 사람.
일단 순례자의 삶을 선택해 길을 걷다보면, 모든 게 순례자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간다.
하루 동안 걷고, 쉬고, 먹고, 자고. 단순한 생활 패턴.
우리가 만들어가는 일상과 어찌 이와 다를 바가 있겠냐만은,
적어도 길거리를 복잡하게 메운 광고지를 찾아보기 힘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하루의 사건사고, 시시콜콜한 드라마 따위로 순례자의 시간을 파고들 틈이 없다.
순례자가 선택한 한 달 여간의 순례의 시간에는
그 무엇보다 자기 존재를 대면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한 발, 한 발 내딛어 걷는 나의 숨과 보폭. 몸의 이상이 있을 땐 주의를 기울여주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또 다른 하루의 생이 지나갔음을
무사히 살아냈음을 감사해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내 존재 자체로 인식 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들.
가끔 길을 걷는게 무료하거나, 기분이 너무 좋거나, 심심할 때 셀카를 찍는 버릇이 생겼다.
'한번 내 표정 좀 볼까?' 하고 사진을 찍는데, 뒤로 오고 있는 순례자를 발견했다.
얼핏 보니, 마놀로 부부이시다. 부인의 오렌지색 자켓이 눈에 확 띈다. 그리고 항상 앞서 걷는 아내와 뒤따라오는 마놀로씨.
가던 길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반가운 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처음엔 남편분과 남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부부.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이번 까미노가 첫번째냐고 물어보니, 아내분께서는 두번째. 남편분은 첫번째 까미노 순례란다.
아내분께서 체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항상 남편보다 5m 이상 앞선 걸음으로 걸으시니!!
그래서 항상 이 부부를 만날 때마다 혼자 몰래 웃음을 짓곤 한다.
마놀로, 뻬뻬 할아버지.
마놀로 할아버지는 뻬뻬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Hola!
이윽고 도착한 마을. "Agua Potable"(식수 가능) 표지를 발견하곤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쉰다. 어제 후식으로 받아 챙겨논 요거트와 비상용 식량을 조금 입에 물었다.
짧게만 휴식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 데, 한쪽 벤치에서 간식을 먹으려고 하는 마놀로 부부를 발견했다. 빵 냄새를 맡고 몰려온 마을의 강아지들이 부부 주위를 둘러싼 모습이 참... 히히히. 웃음이 나온다.
Belorado 에 도착하기 한 1km 전 쯤, 스위스에서 왔다는 순례자를 만나 함께 대화를 하며 걷게 되었다. 대개 처음 보는 순례자에게 묻는 질문의 시작은 거의 이렇다.
"어디서 오셨나요?
언제 어디서 까미노를 출발하셨나요?
오늘은 어디까지 걸으실 건가요?"
이렇게 대화를 시작해서 "왜 까미노를 걷는지" 도 나는 자주 묻곤 한다.
어디서 출발했냐는 내 질문에 이 친구, 집에서부터 걸어왔단다. 세상에. 놀랠 노 자다.
하긴, 헝가리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도 있는데... 직접 집에서부터 걸어오지 않아서 난 모르겠지만. 정말 잘 걷나보다. 와우.
Belorado 에 도착할 무렵, 뻬뻬 할아버지를 또 만났다! 스위스 친구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서 뻬뻬 할아버지와 곧잘 얘기를 나눈다. 아, 나도 스페인어를 좀 했다면 뻬뻬 할아버지와도 얘기를 더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 말입니다.
Belorado city
비가 와서 그런지, 도시가 좀 음산해보인다. 건물들은 과거에 웅장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폐허 분위기가 나는 Belorado. 12세기경부터 부흥하여 13세기까지 경제가 왕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하고 있는 도시.
스위스 친구와 나는 요기를 하러 함께 바에 갔다. 아참... 샌드위치는 빵에다가 하몬만 껴서 나왔는데, 하몬이 유별나게 짰다. 못 먹겠다니까 큰 조각 맛있게 먹는 스위스 친구.
나는 슈퍼에 들렀다가 더 가서 하루 묵겠다고 하고는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오늘 묵을 또산또스에는 슈퍼가 없을 것 같아서 미리 먹을 걸 챙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벨로라도는 일찍 떠나 도착한 또산또스.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내가 오늘 이곳에 묵으려는 건, 이 곳 또한 호스피탈로와 순레자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음, 이 곳은 그라뇽과 어떻게 다를까?
아주 아주 작은 알베르게.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호스피탈로가 나를 반겨준다. 영어를 잘 하는 분이 아니지만 알베르게 여기저기를 알려주시고는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어제 묵었던 그라뇽에 비하면 정말 작은 알베르게다. 정원이 12명이다. (뭐 좀 더 끼워자면 더 묵을 수 있겠지만.ㅎㅎ)
나름 일찍 도착했다. 2등이다. 샤워랑 빨래를 후딱 해치웠다. 날이 조금씩 개어 해가 비추자, 밖에 행거를 놓고 빨래를 널었다. 등산화 깔판은 꺼내 바람이 통하게 해서 마르게 하고 등산화 안쪽에는 신문을 넣고 있는데, 누군가 막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아, 어제 그라뇽 알베르게에서 본 아일랜드 순례자다. 피곤했는지, 배낭을 내려놓고는 양말을 벗어 물집 부분을 살피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빠르고 강한 아일랜드 영어 억양은 새로운 거라, 조금은 긴장했지만,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선에서 대화를 함께 나눴다.
"여기 알베르게는 어떤 것 같아?"
"어제 묵은 곳보다는 작은데,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어."
한번 둘러보고 오겠다는 그. 한번 훑고 오더니, 어깨를 으쓱 거리더니 그냥 더 가고 싶다고 한다.
그래, 부엔 까미노!
방으로 올라가 쉬는데 노라가 왔다! 아까 아침에 본 게 마지막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보고 언제 왔냐고 노라가 물었다.
"음... 정확히 모르겠는데..."
"3시간 전에?"
"아마 그럴걸..?!"
"에이 설마."
노라가 믿지 않는다. 그래, 믿거나 말거나.
호스피탈로의 안내로 마을 구경에 나섰다. 오늘 함께 알베르게에 묵게된 사람들 모두 따라 나섰다.
나무 아래에 모인 순례자들
또산또스의 메인 광장에서
성당 문이 닫혀 있어 겉만 보고, 호스피탈로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San Esteban.
숲으로 난 길을 따라 금방 도착한 산 중턱.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내일 걷게 될 길이 저기 너머 일까?
비바람에 깎인 건지,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이랬는지, 좀 독특한 모양의 산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큰 바위와 한 쪽에 있는 작은 예배당. 오, 도대체 어떻게 지은 걸까? 안에 들어가면 1유로를 내야하고, 사진촬영은 금지되어있다. 순례자 모두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간다.
예배당에는 긴 의자가 몇 개 놓여져 있고, 앞 쪽에는 다른 성당들이 그렇듯이 그림과 함께 장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는 다가가서 만지지 못하도록 쇠창살이 있었다. 모두들 신기해서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누군진 잘 몰라도, 마을 주민으로 추정되는 여자분께서 예배당 안 곳곳을 설명해주셨다. 문제는... 그 분이 스페인어로 얘기하셨기에, 자세히 듣는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순례자 중 한 분께서 스페인어도 아셔서, 영어로 통역을 해주셨다.
거대한 바위 아래 지어진 예배당의 전래는 이렇다. 8세기 경에 무슬림의 정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이 동굴의 종 아래에 아기 예수가 그려진 그림이 숨겨졌던 곳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그림은 12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 그림은 이 곳에서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겨울에는 이 곳에 보관하고, 여름에는 산 아래에 있는 성당으로 옮겨 보관한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 어떤 한 사람이 이 곳으로 와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어엿한 건물 모양을 갖춘 건 마을 사람들이 그 남자가 죽은 후 지어줬다고 한다.
노라 덕분에 한 장 찍었다~
구경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왔다.
Tosantos의 작은 알베르게.
호스피탈로의 말에 의하면, 이 알베르게는 올해 보수 공사를 했다. 자원봉사자들의 땀이 있었기에, 좀 더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것 같다.
아직 식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해를 쬐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려다가, 처음 보는 순례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오른쪽에 있는 여성 분! 성함은 까먹었다.(-_-;;) 영화 관련된 일을 하신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 영화 몇 작품을 봤다며 얘기를 해주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흥미로웠다면서 영화 제목 몇 개를 술술 말한다. 그 중에 내가 본 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었다. 나도 그 영화가 인상 깊었다며 맞장구 치며 얘기했다.
이제 드디어 저녁 시간! 이 아니라, 요리할 시간인가보다. ㅎㅎ 알베르게쪽에서 호스피탈로가 일정을 알려준다. 오늘의 메뉴는 파에야! 7시에 식사를 한다고 하니, 파에야 만드는데 1시간이 걸리나 보다. 헉. 그렇게 오래 걸리나?
파에야를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다. 먼저 기름에 닭고기를 볶아 익히고 - 이건 내가 했다.- 그 다음엔 호스피탈로가 와서 쌀을 넣고, 양념도 하고.
오.. 쌀이 들어간 음식을 먹다니, 안그래도 밥이 그리웠는데!
기대된다, 오늘의 요리!
파에야를 만들고 있는 숀탈 아주머니~
순례자들이 몇몇 부엌에 들어와 호스피탈로가 음식 만드는 것을 돕는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이것저것 들춰본다.
'메르시 보꾸' 아주머니
노란색 잠옷바지가 참 탐난다.
프랑스에서 오신 '메르시 보꾸' 아주머니. 나헤라에서 유독 튀는 잠옷을 입어 기억에 박혔는지 어제 그라뇽에서 뵌 것도 기억난다. 영어를 못하셔서, 나는 프랑스어를 못해서, 얘기를 잘 나누진 못하고 있다. 성함을 아직 몰라서, 아주머니께서 자주 쓰시는 말로 닉네임을 지었다. 물론 나 혼자 통용하는 닉네임이다. 활짝 웃으면서 파에야를 만들고 있는 아주머니!
파에야를 완성하는 호스피탈로!
사실... 정말 배고파서 참을 수 없어 부엌을 왔다갔다 한 것 같다. 정말이지.
어찌된 요리인지 몰라도 음식이 완성되기까지 거의 1시간이 걸렸다. 정말 1시간이 걸리다니.
아... 이 얼마나 기다렸던가!!
움직임이 재빨라지는 나와 달리, 호스피탈로는 연신 느긋하다. 테이블에 저녁 식사 셋팅 완료! 이젠 먹기만 하면 된다. 얏호 ;)
노라와 헝가리에서 온 피터. 파에야가 다 사라지기 전에... 찰칵! 오른쪽에 남자분들. 프랑스에서 오셨다. Grañon - Redecilla del Camino - Viloria de la Rioja - Villamayor del Río - Belorado - Tosantos = 21.2km
드디어 맛 보게 되는 파에야! 닭고기가 들어간 파에야다. 음. 색깔은 마치 카레 같다.
그라뇽은 40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모여 왁자지껄했는데, 또산또스는 12명의 순례자만이 함께 모여 도란도란 식사를 한다. 아까 스페인어를 영어로 통역해주신 분이, 호스피탈로가 하는 말을 영어로 또 통역해주었다.
(파에야는 스페인의 지방 '발렌시아' 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발렌시아 지방어로 파에야는 '프라이팬' 을 뜻한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파에야.
음~ 생각보다 맛있다. 카레와는 다른 뭔가 독특한 맛이다. 요새 만날 느끼한 음식만 먹다가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간이 된 음식을 먹으니 위가 꿈틀꿈틀 춤을 춘다. 아~ 맛있다 >_ <!!
정말 많다고 생각했던 파에얀데, 먹다보니 어느새 한 접시 분량만 남았다. 호스피탈로가 '누가 남은 걸 먹을래요?' 라고 물어보는데... '저요!!' 라고 손들어 말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 눈치보느라 용기내서 말을 못했다. 다들 배부르게 먹은 걸까? 결국 남은 파에야는 다른 순례자에게 넘겨졌다.
마지막 남은 파에야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는 게, 속으로 두고두고 아쉽지만...
그래, 원래 덜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지. 그래서 그런지, 내 생애 최고의 파에야는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요, 파에야의 본고장이라는 발렌시아 지방에서 먹은 것도 아니지만, 내 생애 최고의 파에야로 등극한 또산또스의 파에야.
진정 명품이다. ㅎㅎ
식사를 마치고 맨 위층에서 미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어제 그라뇽에선 미사를 참석하지 못한 터라, 오늘은 꼭 참석하리라 벼르는 중이다. 사실 열흘 남짓 순례자의 길을 걸으면서 제대로 미사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기독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카톨릭 미사는 한국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고, 더군다나 여기는 스페인.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에서 겨우 Padre, Madre, Nosotros 라는 아주 적은 단어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참석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솔직한 이유로 하나 더. 미사 참석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미사 참석하고 나서야 그 필요성을 알게 되긴 했지만... )
순례자들이 묵는 방을 지나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 호스피탈로는 촛불을 켜 어둠을 밝히고 순례자는 나란히 방 한쪽에 가 앉았다. 호스피탈로는 순례자의 국적을 물어본 후, 그 나라 언어로 적힌 기도문을 나눠주었다. 놀랍게도 한국어로 된 기도문도 있었다.
이윽고 호스피탈로의 진행으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순례자는 앉은 순서대로 각자의 언어로 기도문을 읽어내렸다. 이제 내 차례. 조용한 공기 가운데 나의 언어를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한국어가 낯설 외국인들에게 나의 음성이 어떻게 들릴까 궁금해하면서.
성가를 부를 때, 나는 잘 몰라 입만 벙긋벙긋하다 노래를 마치고, 미사가 끝났다. 아차차. 뒷정리를 해야했구나. 깜빡하고 있었다.
모두 아래로 내려와 식사 뒷정리를 하려는데, 알고보니, 프랑스에서 온 할아버지께서 혼자 설거지를 다 하셨다. 함께 온 분들이 친구 어깨를 두드리며 '허허' 하며 웃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테이블을 닦고 마지막 정리를 도왔다.
어제 그라뇽에서 잘 때 상당히 한기를 느꼈었는데... 오늘도 매트리스 위에 자는 거라 좀 춥게 느껴진다. 감기나 걸리지 않았음 좋겠다. =ㅅ=
나헤라에서부터 들고 온 쌀과 버섯. 계속된 습한 날씨로 버섯은 상해가는 것 같고, 쌀은...
음... 괜히 욕심 부려 들고 다니다 쓰지도 못하고 쓰레기통 행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알베르게에 놓고와 다른 순례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을 게다.
오늘도 열심히 걸어온 이 길.
조금 더 열심히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찾는 친구, 마르코스는 더 멀리 걸어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순례를 마치고 포르투갈로 여행갈 거라고 했는데, 이 길위에 있는 한 다시 한번 꼭 만나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헤어져야 섭섭하지 않을 것 같다.
어제에 이어 호스피탈로가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묵은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순례자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좋은 시설을 가진 알베르게도 많지만
순례길의 역사상 그 면모가 전해내려오는 알베르게에 묵어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함과 평화를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
비바람을 피해 누울 자리가 있고, 편히 쉴 곳을 얻은 데다 호스피탈로의 순례자를 위한 친절과 정성, 봉사는 하루 나절 외롭고 힘들었던 순간을 어루만져주어 평안한 꿈을 이루게 한다.
또산또스가 조그맣고, 알베르게도 낡고 오래됐지만, 외관만 보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와 호스피탈로와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좋다.
앞으로 남은 까미노도 이런 시간들로 채워가리라.
오늘의 코스 >_ <!!
오늘의 지출
기부금 3유로, 바에서 보까디요 & 꼴라까오 4.2유로, 슈퍼에서 2.9유로 = 10.1유로
오늘 받은 스탬프♡
또산또스 알베르게에서
레데씨야 관광 사무실에서
까미노 길을 걷기 위해서 한국을 떠났던 때도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작년 이맘 때쯤에 출국해서 갔으니... 시간 참 빠르네요 흑. (주절주절)
이건 여담이지만... 순례 이후 스페인 여행을 2주 정도 더 했었는데, 파에야를 몇 번 식당에서 사 먹었어요. 그런데 호스피탈로가 만들어 준 것 만큼 맛있게 먹은 건 없었어요 ^^ 싼 걸 먹어서 그랬을까요? 뭐, 만드는데 오래 걸릴줄 알았는데 식당에서는 20분이면 금방 만들어져서 나오더라구요~ 무튼 저는 항상 파에야를 보면 또산또스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됐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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