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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10] 순례 9일째, 내 영혼이 따뜻해졌던 날 본문
엽서를 쓰고 있는 노라. 테이블 셋팅 중! 식사를 하기 위해 함께 모인 순례자들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례자들과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호스피탈레로들. 샐러드와 와인 그리고 빵 맨 위층의 순례자 잠자리 알베르게의 부엌 루이스와 마가렛.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들. 아일랜드에서 온 순례자 그리고 노라. 유재준 선생님, 부인되시는 분과 나. 뒷정리를 도맡아 하는 순례자들.
최고의 알베르게, 그라뇽 2008년 6월 1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아주 퍼붓듯이 내린다.
그래서 선뜻 길을 나서기가 겁난다.
매일을 걸어야 하는 순례자의 삶. 어쩌겠나. 좀 이따 출발하나, 지금 출발하나 매한가지다.
배낭끈을 질끈 부여잡고 길을 나선다.
최근에 오래 걸어서 피로가 좀 쌓였는지, 출발 때부터 아직 풀리지 않은 피로함을 느낀다. 몸은 무겁고, 허기는 밀려오고, 다리도 아프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다정한 이도 없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기력이 없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무튼, 오늘도 무사히.
오늘은 특별히 짐이 하나 더 늘었다. 어제 요리를 하고 남은 재료 - 쌀과 버섯 - 를 비닐에 넣어 가져가고 있다. '언젠가 요리해서 먹어야지, 아깝잖아??' 이런 기특한 생각에 챙긴 쌀과 버섯. 얼마 무게가 나가지 않는 거지만, 배낭에 넣자니 괜시리 무겁고 해서, 손에 들고 간다.
바(Bar) 가 50m 에 있다는 표시를 보곤 갈까 말까 하다가, 언제 또 다른 바(Bar)를 발견할 지 모르겠어서, 귀찮았지만 표지를 따라 갔다. 이미 이곳에 온 순례자들이 몇 있나보다. 문 앞엔 순례자들의 배낭과 우비가 놓여있다. 나도 배낭과 우비를 밖에 놓고 지친 몸으로 이끌고 가게 안으로 터벅 터벅 들어가는데, 예기치 않게 들리는 소리.
"Lee!!"
아니, 세상에. 이게 누구야!! 노라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서로 껴안는다. 반가운 이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기쁨은 더욱 컸다. 궂은 날씨에 몸도 마음도 지쳤었는데 노라의 다정한 포옹이 '피로군'을 싸그리 녹아내리게 한다. Puente la Reina 에서 헤어지고 나서 처음 만나는 노라. 혹시 또 헤어지고 나서 다시는 못 만날까봐, 다이어리에 노라의 메일 주소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참, 노라는 마르코스를 봤을까?
"노라, 마르코스 봤어??"
"응, 어제 마르코스는 나랑 같은 알베르게에 묶었어."
난 마르코스가 어딨는지 무척 궁금해했다며, 혹시 그가 오늘은 어디까지 걷겠다고 했는지 아냐고 물었지만 노라는 모르겠단다.
코코아 한 잔을 시키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잠깐 몸 좀 추스리다가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일어섰다. 노라도 오늘 그랴뇽까지 걸을 거라고 한다. 좀 이따 보자며 인사를 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오늘 숙박하고 싶은 곳의 수용인원이 40명 밖에 되지 않아, 혹시나 게으름을 피우다가 못 머무르게 될까 두렵다. 나는 정말 그랴뇽에서 머물고 싶다. 호스피탈로가 정성껏 만들어주는 저녁 식사를 꼭 맛보고 싶다는 일념하에 말이다.
그래서 쉬지 않고 열심히 걷는다.
그러다 아주 커다란 물 웅덩이를 만났다. 이런. 어떻게 해야하나.
그냥 지나가자니 신발이 다 젖을 것만 같다. 으이쿠.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를때, 서너 무리의 순례자들이 왔다. 그들도 잠시 멈춰서 고민하더니, 배낭 안에 있는 비닐을 꺼내 등산화가 물에 젖지 않도록 동여매고 물웅덩이를 건넜다.
'아, 저런 방법이 있구나.'
혹시 나도 비닐이 있나 배낭을 내려놓고 살피고 있는데, 그때 또 다른 순례자가 왔다.
여기를 어떻게 건너야 하나, 10분째 고민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물웅덩이를 씩씩하게 건넜다. 비닐도 없이.
나는 놀라 쳐다봤고, 잠시 멍해진다.
그래, 맞아.
그냥 부딪치면 될 것을.
무엇이 지레 무서워 서성이고 있었을까. 그깟 신발 젖는게 말이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나도 그처럼 물웅덩이 앞에 다가가 한발 한발 내딛었다.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양말에 차가운 물의 존재가 느껴지지만
그래, 조금 찝찝하더라도 어쩌겠나.
쟁쟁한 볕이 들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장애물인 물웅덩이는 지났지만...
춥다.
젖은 신발은 더 무겁게만 느껴지고, 양말까지 젖으니 체온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
어서 따뜻한 곳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계속 비가 내려 주위에 있는 풍경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아니, 어쩜 나의 투정일지도...)
너른 들판과 정갈한 길을 재빨리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니, 나 혼자다.
아까 지나쳤던 사람들은 아직 언덕길에 머물러 사진을 찍고 있다.
'이런,, 풍경의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내달렸구나.'
맑은 날씨였다면 정말 훤히 밝아보였을 풍경인데, 비가 내리고 앞을 제대로 구경할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순식간에 지나쳐버린, 다시는 붙잡지 못할 아름다움.
.... 다시 되돌아가기는 아깝고, 다음에 다시 오자.
아쉽지만 말이다.
나는 갈 길이 바쁜 몸이라구.
그렇게 서둘러 도착한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성인의 이름을 딴 이름이라, 길고 독특하게 느껴진다. 책에서만 접했던 이 도시를 직접 오다니.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여행의 현재진행형.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책에서 읽은지 좀 되서 가물가물하다만, 이 마을에 그 전설의 '닭' 의 후손들이 아직도 있다는 건 또렷이 기억이 난다. 어딘가 있을 텐데, 한번 보고 가야 하는데,
광장에 서서 갈 길을 몰라 서성이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서 있다. 순간 마르코스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마르코스가 아니었다.
"그라뇽??"
그라뇽 가는 방향은 이 쪽이라며 어서 오라는 순례자. 엉떨결에 따라 걷게 되었다. 이로서 나는 전설의 닭도 못 보고 이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실.
새로운 브라질 친구 한 명이 생겼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내 이름을 알려주자, 어렵단다. 쉽게 'Lee' 로 불러달라고 하니, 자기는 내 이름을 꼭 불러주겠단다.
몇 번이고 열심히 알려주지만, '걍엉, 걍응' 으로 발음하는 루이스.
재밌는 친구다. 영어를 잘 못 해서 소통하는데 원활하지는 않지만, 여행하면서 영어를 좀 들었는지 몇 단어는 안다. 비가 너무 내려 중간에 길이 막혔는지 앞서 가던 순례자들이 길을 돌아왔다. 결국은 도로 위로 걷게 되었다.
루이스는 종교가 특이하게도 불교다. '종교가 뭐냐' 는 질문을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자신은 '부디스트' 라고 말하는 루이스.
그라뇽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뒷모습을 보고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유재준 선생님 부부이시다. 아내분께서 다리가 좋지 않으셔서 힘들어하셨다. 오늘은 날씨도 궂은 터라, 쉽지 않으셨을 텐데...
조그마한 교회 오른쪽 뒤편으로 가니 작은 울타리 문을 지나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그라뇽의 알베르게에 도착.
교회에서 머무는 건 처음이네...
걱정했던 바와 달리 아직 정원이 다 차진 않았지만, 은근 일찍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 곳은 침대는 없고, 대신 얇은 매트리스만 있다.
방으로 안내를 받고 배낭을 내려놓고 매트리스 위에 침낭을 깔았다. 여전히 비는 오고, 한기가 가시질 않는다.
루이스가 바에 가자고 해서, 옆에 있는 순례자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함께 갔다. 따뜻한 수프와 와인, 그리고 올리브를 함께 먹으며 얘기를 했다. 합석한 순례자의 이름은 마가렛, 그녀는 폴란드 사람이다. 남편과 독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배를 채우니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 하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노라가 왔다. 아침에 바에서 봤을 때랑 많이 다르다. 몹시 지쳐보인다.
이윽고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순례자들이 한데 모였다. 테이블보를 깔고 의자를 정리한다.
나는 유재준 선생님 내외 분 옆에 앉고 노라는 맞은 편이 앉았다.
컵과 접시를 테이블 뒤쪽까지 전달하고 한 식탁에 앉게 된 순례자들끼리 서로 정답게 대화를 한다.
어느새 식탁 위엔 와인과 샐러드, 빵이 차례로 올려졌다.
샐러드도 맛있고, 수프도 맛있고, 와인도 참 맛이 좋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정다운 분위기가 흐르고 넘쳐 나는 이 곳.
정말 이 곳에 오기를 잘했다.
최신시설의 알베르게와 그라뇽의 이 곳 중 어느 곳을 선택하겠냐고 물으면 당연 그라뇽이다.
식사를 다 마친 후, 아래층에서 벌여진 만찬의 장면을 찍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카메라를 쥐고 폼 잡는 나를 보곤 노라가 '브이' 자 모양을 하곤 활짝 웃는다.
호스피탈로의 음식 솜씨가 좋았는지 수프는 이미 바닥난 상태. 와인도 바닥난 상태다.
식사는 끝났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옆 테이블의 빈 와인병까지 끌어모아, 마치 세 사람이 다 마신 냥 보일려고 설정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요거트까지 후식으로 받다니. 안그래도 배가 부른데, 후한 대접 때문에 포만감은 더욱 더 크다. ㅎㅎ
이윽고 호스피탈로가 주의를 끌고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알려준다.
사진은 찍지 말라고 했는데, 감사함을 느끼는 분들 얼굴을 어찌 찍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나.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국적이 다양해서, 영어, 스페인어 등으로 설명을 반복해서 해주었다.
몇몇은 부엌으로 가고, 다른 순례자들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 간다. 사실 나도 미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뒷정리를 도와주다보니 결국은 미사를 놓쳤다.
노라는 등불 아래에 자리를 잡고 못 다 쓴 편지를 쓰는 중이다. 몰래 찰칵.
조용한 알베르게 이모 저모를 사진으로 담는다. 어둠을 밝히는 등과 고요함을 깨는 인기척.
더없이 편안한 공기가 머물고 있는 이 곳. 그라뇽.
호스피탈로의 친절과 그들이 베풀어준 음식 뿐만 아니라, 함께 모인 순례자들의 좋은 기운이 더불어 이 곳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싶다. 좋은 건 많은 이들과 나눌 수록 배가 된다는 사실. Najera -Azof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Grañon
알 수 없는 조바심과 걱정거리를 안고 바쁘게 온 이 곳.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함이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져 평화를 얻다.
오늘 얻은 교훈은, 원하는 알베르게에 묵기 위해서 경주하듯 빨리 걷느라 현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설사 원하는 곳에 묵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누구를 탓하지 말라는 것.
세상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니깐.
'그동안 '빨리빨리' 의 코리안 근성이 나를 지배했다면, 이제부턴 난 내 방식대로 길을 즐기면서 걸어야 겠다. ' 라고 선포하며, 그라뇽에서 얻은 신비로운 평화를 가슴에 간직한 채 잠을 청하지만...
참... 춥다.
오늘의 코스~ >_ <!!
오늘의 지출 =ㅅ =!
꼴라까오(코코아) 1.1유로 , 수프 3.5유로 = 4.6유로
오늘 받은 스탬프~
그라뇽의 바에서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에 내려오는 전설!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독일인 가족-아버지, 어머니, 아들- 이 순례길 도중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의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여관주인의 딸이 아들을 유혹했으나, 아들이 그녀를 거부했다. 화가난 그녀는 친구에게 교회에 있는 은을 가져오게 하여 아들의 가방에 숨기게 했다. 다음날, 그녀는 그를 신고했고, 가방에서 은이 발견된 결과로 그를 교수형에 처해졌다. 중세시대때는 교수형을 당한 범죄자는 죄의 대가에 대한 생생한 경고로서 교수대에 남겨진다. 그의 부모는 콤포스텔라까지 순례를 계속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곳에 왔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교수대에 다가간 부모는 놀랍게도 반갑게 그들에게 인사하는 아들을 보게 된다. 아들의 말인 즉, 성 야곱이 그를 살아있게 지켜줬다며, 자신의 무게를 항상 지탱해주어 목이 졸려 죽지 않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건 기적이야! 그의 부모는 당장 마을 관리에게 가 자신의 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 저녁식사를 위해 닭을 굽고 있었던 그는 콧방귀를 뀌며 "당신의 아들은 이 굽고 있는 닭들만큼 살아있다" 고 말대꾸를 하자마자 바로, 불 위에서 굽혀지고 있는 닭들이 살아있는 닭으로 모습을 갖춘 채 꼬꼬댁 거리며 날아갔다는 이야기.
교수대와 되살아난 닭들의 후손(?) 들은 아직 이 마을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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