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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39] 순례 35일째, 노라와의 재회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39] 순례 35일째, 노라와의 재회

Yildiz 2012. 1. 2. 00:31



또 다시 일몰을 놓치다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모처럼 달콤한 잠을 잔 아침!
알베르게의 빽빽한 침대숲에서 잠을 자는 게 아닌
아담한 싱글룸에서 혼자 침대를 독차지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잠을 잤더니, 푹 잘 잤다.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짐을 챙기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어제 피니스테레에 늦게 도착한 바람에 바닷가며 마을이며 제대로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바로 묵시아로 떠나기 아쉬우니까 피니스테레에서 하루 더 있을까?
아니면
이 선택들을 절충해서 오전에는 피니스테레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걷기 시작할까.
딱히 결정을 못 내리겠어서 우선 꼬르륵 거리는 배부터 채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민박집 근처에 있는 바로 왔다. 

바에는 이미 깔로가 와 있다. 깔로는 오늘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돌아간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일정 때문이다.

탁자 위에는 깔로가 주문한 홍차와 알록달록 꽃무늬의 노트가 놓여있다.

"이 노트는 뭐죠?"

"내 다이어리야. 사실 초등학생 조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건데, 조카가 안 쓰길래 내가 쓰고 있지."
 


깔로가 한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해서 시집을 꺼내 보여주었다. 난생 처음 보는 문자를 신중하게 쳐다보는 깔로. 외국인에게 한글은 정말 신기하겠지?!

깔로에게 부탁 하나 했다.
생장 우체국에 전화해서 그곳에 내 우편물이 반송됐는지 대신 물어봐 달라고 말이다. 
깔로가 불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원 중에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겠지 싶어서다.

다행히 스페인어 할 줄 아는 사람은 있었지만, 전화카드 산 것을 한 장 다 쓰고 깔로 핸드폰으로 또 연락을 해서 내 짐을 바르셀로나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 봤으니.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지.

바다라면 꼭 들어가 봐야하는 성미를 지닌 깔로는 피니스테레를 떠나기 전에 꼭 수영을 하고 싶다고 한다.

깔로가 가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오늘 일정을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
남은 시간동안 해변가에 있기로 하고
#드디어,+_ + 바다로 향한다. 

해변에는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깔로는 침낭을 꺼내 모래 위에 깔고 자리를 마련한다. 



이제 막 피니스테레에 도착한 걸까.
독일에서 온 것 같아 보이는 순례자가 우리 옆에 배낭을 놓더니 묻는다

"잠깐 제 배낭 좀 봐줄 수 있어요.?"
"네, 물론이죠."

왜 그런 말을 했나 싶었는데, 중년의 여성은 나와 깔로가 있는 걸 전혀 개의치 않고,
옷을 한 꺼풀씩 다 벗고는 알몸이 되었다.
 
난 순식간의 일에 당황해서 얼굴을 돌렸다가
여자가 바다를 향해 걸어가자 그제서야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전이라 해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탓도 있지만,
그나마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녀가 뭘 입고 있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부자연스러움이란 없다.
단지 나만 조금 놀랐을 뿐....


깔로와 나란히 앉아서



"정말 차갑네요."

바다에 들어갔다온 여자는 덜덜 떨고 있지만 얼굴엔 만족의 미소가 가득하다.


"왜 맨몸으로 물에 들어간거지?" 내가 궁금해하자 깔로가 알려준다.

"이게 중세시대 때 순례자들이 했던 순례 의식 같은 거래.
순례길을 다 마치고 여기 피니스테레의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 말야.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나 할까. "

일종의 정화의식이라고 보면 될까.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는 그런 의식.

나도 나중에 무거운 고민을 싸매고 다시 까미노로 와
이렇게 바닷물에 퐁당 빠져보고 싶다. 저 여자처럼, 가볍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윽고 여자는 떠나고,
이제 나도 바다와 만날 시간.

파도가 힘을 잃고 사그라드는 땅의 경계에 살금살금 다가가 두 발을 물에 적신다.
발목에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반겨주는 바닷물은 차갑지만 견딜만 하다.

깔로와 함께 해안가를 따라 무작정 걷다가 나는 배낭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깔로는 수영을 하겠다며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물이 차가워서 깔로는 이번에도 수영을 별로 하지 못하고 나온다.


버스 타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깔로는 짐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먼저 순례길에 그의 동반자였던,
자기 키높이만한 나뭇가지를 버려야할 순간이 왔다.

그는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왼편에 있는 작은 조각배 옆에다 세워두었다.


침낭을 점령한 모래들. 그리고 한 가운데에 반토막난 왕 레몬. 오렌지가 아니라 진짜 레몬!!







#굿바이 깔로.



"이탈리아에 오면 연락해!"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버스터미널로 가서 깔로를 배웅하고는 조금 허탈해졌다. 그와 있을 땐 시도때도 없이 깔깔 웃으면서 떠들다가 혼자 있게 되니 익숙한 침묵이 찾아온다. 하아. 다시 혼자구나.

오늘 묵시아 가는 건 포기. 아니 연기!
묵시아는 내일 가고, 오늘은 어제 제대로 못 본 피니스테레 0km 지점에 다시 다녀와야겠다.

그나저나 우선 오늘 숙박할 곳을 찾아야지.
혹시나 알베르게에서 머물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지만, 어제 도착했기 때문에 내게 침대를 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어제 묵었던 곳에 가야겠구나' 단념하고 돌아서려는데,
누가 나를 부른다.

부정언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첫 날,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자다.
언니는 오늘 피니스테레에 왔다고 한다.
함께 장을 봐서 저녁으로 알베르게에서 스파게티를 해먹자고 한다.

"저 우선 숙소 잡고 다시 올게요!"




#드디어, 다시 만난 노라!


부정언니와 함께 큰 마트를 찾아가 토마토 페이스트와 소세지, 스파게티 면 등 요리재료를 사서 알베르게로 왔다.
난 까미노를 걸으면서 스파게티는 한번도 해먹은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에 잘 보고 배워서 혼자 해먹어봐야겠다.

스파게티 만드는 것은 정말 '의외로' 간단했다. 면 삶고, 토마토 페이스트를 후라이팬에 데워서 볶은 양파와 소세지와 곁들이면 끝!! 토마토 페이스트가 그리 비싸지 않는데다가 둘이 먹는데 양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렇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니. 놀라워라.

부정언니 덕분에 스파게티를 맛있게 배불리 먹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어제 못 봤던 일몰은 꼭 제시간에 봐야겠단 생각으로 서둘러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내 눈에 끌린다.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도 될만한 대수롭지 않은, 누군가의 옷.
테이블 옆 의자에 걸려있는 연한 하늘색 점퍼에 눈이 간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뭐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물체들이 느린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듯한 느낌,
이 묘한 기분은 또 뭐지.

그때.

호스피탈로 사무실에서 나오는...
"노라"를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는 '피니스테레 완주 증명서'가 들려있다.

"세상에! 노라!!"

그녀의 만남이 너무도 뜻밖이어서 금세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아, 하늘색 점퍼가 노라의 것이구나.

산티아고를 떠날 때부터 이미 욕심을 버렸었다.
이젠 까미노 길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노라, 난 네가 집으로 돌아갔을거라 생각했어."
"아쉽게도 대학에서 날 안 부르더라구."

"아, 그렇구나..."

또산또스 이후로 보지 못했던 노라.
난 그녀가 대학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는 까미노를 중간에 그만 두고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미노를 계속 걷게 되서 결국엔 너를 다시 만났잖아!"

 

다시 만난 노라와 함께.


믿기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틀 걸을 길을 밤새 걸어왔다고 한다.

"아니, 밤에 산에서 까미노 지표는 어떻게 찾았는데?"
"라이트로 찾았지."

노라는 내가 처음 보는 일행들과- 독일 사람들- 함께 걸어온 모양이다. 
오는 길에 무척 힘들었겠지만, 함께 걷는 친구들이 그녀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었겠지. 다행이다. 

노라는 내 선그라스를 보고는 마음에 든다며 한번 써본다.


피니스테레 알베르게 입구 앞에서, 노라



#으앙, 난 몰라.


노라와 다시 인사를 하고는 피니스테레의 일몰을 보기 위해서 부정언니와 길을 나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긴 자켓을 하나 챙겨야 한다.
해가 지고 나서 1시간은 걸어서 마을에 와야 하니, 추울 것 같아서다.

그런데 왠일?
민박집 문을 열수가 없다.
분명 열쇠는 맞는데, 왜 문이 안 열리는 거지?

세상에!!!
나 이러다가 오늘 여기서 못 자는거 아니야?
별 생각과 걱정들이 함께 밀려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 주인 연락처가 있다는 것, 그중 불행은 주인이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거다.
내가 스페인어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과연 내 말을 알아 들을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일단은 연락을 해봐야지.

민박집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를 허겁지겁 찾고,
있는 동전 다 털어서 넣어 주인 전화번호를 누른다.

스페인어로 열쇠가 무슨 뜻인지만 알았더라도 좋았을텐데.
상대방에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을 거란 생각이 들면 되던 영어도 잘 나오지 않는다.
무튼, 10분간의 되도 않는 대화을 통해 나는 최대한 나의 급박함을 알리고자 했다.

무슨 낌새라도 챘는지 주인이 집으로 오겠다는 말을 한 것 같다.
집 앞에서 기다리자 주인 아저씨가 자동차를 몰고 왔다. 

열쇠를 건네주면서 안된다며 얘기를 하자,
아저씨는 내게 시범을 보여준다.

"이 문이 잘 안 열려서 어쩌고 저쩌고..."

아... -ㅅ -;;
이 간단한 것을 모르고 시간만 허비하다니. 아. ㅠ_ ㅠ

언니한테 미안해 죽겠네, 증말.

재빨리 방에서 자켓을 꺼내들고 나와 부정언니와 함께 일몰을 보러 길을 나선다.
시간을 허비했다고 주저 앉아 울상을 지을 시간도 없다.




#가지마, 해 떨어졌어!!


피니스테레 마을로 돌아오는 순례자들이 부정 언니와 나를 멀리서 보더니
손을 내어졌는다.

"Finished!"

윽!!!
해가 졌다보다.

그래도 아직은 밝으니 종점까지는 가봐야지

부정언니와 나는 더더욱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한다.


해, 떨어졌다.


꼬부랑 꼬부랑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드디어 마지막 지점이 보인다.
정말, 해는 이미 져서 수평선에는 연분홍, 보라빛의 노을만 남아있다.


순례자 동상


에휴. 나 때문에 놓친 일몰.
부정언니에게 참 미안하다.


부정언니와 함께



노을이 마지막으로 불타오른다. 지글지글.



피니스테레에 도착하면 하는 의식중 하나. 불 태우기.


결국엔 노을이 사라지면서 대지와 바다에 어둠이 내린다.
좀 더 일찍 이 곳에 도착했으면 좋았을것을.


오늘도 어제처럼 플래쉬 샷. ㅠㅅ ㅠ


부정언니도 내일 묵시아로 떠날 예정이다.
내일 아침 8시에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광장에서 만나 같이 걷자고 언니와 약속을 잡는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밤이라 함께 바에 가서 가볍게 음료를 마신다.
남은 여정이 그리 부담되지 않으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고나 할까.

피니스테레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난 문 잘 열고 방에 들어갔다. 휴우 -ㅅ -;;)



오늘의 지출

카페 레몬에이드 1.3 + 인터넷 2 + 전화카드 5 + 숙소 12 + 슈퍼 4.97 + 스파게티 1.5 + 과일 2 + 맥주 1.5 + 공중전화 2 = 33.27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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