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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41] 순례 37일째,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본문
가장 힘들었던 묵시아 가는 길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굿바이, 노라.
노라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일어나 짐을 챙겼지만 노라는 그새 잠이 깨서 아침 일찍 떠나는 나를 배웅해준다.
하루 숙박비로 5유로 정도 주려했지만, 수중에 있는 잔돈이 5유로가 채 되지 않아, 지폐 한 장을 건넨다.
노라는 큰 액수라고 받지 않으려 했지만, 이 돈으로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며 손에 쥐어 주었다.
혼자였다면 무척 외로웠을 피니스테레의 마지막 날을 노라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이다.
떠나기 전 노라의 사진을 찍자, 노라는 나를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달라고 한다. 아직 덜 마른 스포츠 타월, 먹을 것이 가득 든 비닐봉지 손에 들고. ㅎㅎ
안녕, 노라!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기를!!
#굿바이, 피니스테레.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일찍 출발해서 그런가...
대기에는 새벽의 흔적이 아직 머물러있다.
구름 위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에 감사해야할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헤아려본다.
여행 오기 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제목이 떠오른다.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여행을 떠나와서 거의 매일 같이 일출을 보고 일몰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인연들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들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고뇌의 시간들을 지나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사진을 여러장 찍다보니, 운 좋게 사진 중앙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걸렸다.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피니스테레의 선물일까? = )
피니스테레 마을은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중이다.
오늘의 태양이 당연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어제만큼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피니스테레를 보게 된다면...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할테니 말이다.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피니스테레에게 진정한 작별인사을 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인적 없는 고요한 모래사장 한 가운데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고마워, 생의 이 순간을."
짜리몽땅한 스틱으로 모래 사장에 순간의 감상을 적는다. ...세상의 마지막에게 작별을 고한다. 고마워, 모든 것에.
머지 않아 파도가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일기장 삼아 내 기분을 적고 싶다.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무수한 걸음들이 더해져 당도하게 된 이곳, 피니스테레.
수평선 너머를 지긋이 바라보며 헤아려본다.
앞으로 내가 걸어나가야할 길은 어떤 곳일지를.
순례자의 길은 이제 거의 끝났지만,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할 인생의 길...
얼마나 머나먼 길을 나서야할까.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렇다고 늘 어둠 속을 걷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순례길에서 배웠다.
어느 순간 길에서 넘어지더라도,
땅을 박차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음을,
나 자신의 힘을 조금씩 깨달은 것 같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 "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별 생각없이 흥얼거려본 건데, 노랫말이 지금 내 상황과 꼭 맞는 것 같다.
이번에는 목청을 가다듬고 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본다.
앞부분 가사는 몰라서 후렴부분만!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남은 여행과
내가 걸어가야할 인생길. 용기를 갖고 걸어나가야지.
힘내자!
어제는 중간에 멈춰서서 피니스테레를 바라보는 횟수가 많았는데,
오늘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이곳까지 슝~ 와버렸다.
어제 피니스테레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 멈춰서서 뒤돌아 피니스테레를 바라본다.
오늘의 피니스테레는 어제만큼 엄청~나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지는 않다.
다행이다. 오늘은 쉽게 떠날 수 있어서.
한 20분 정도 더 걸었을까. 길바닥에 빨간색 종이가 반듯하게 놓여있는게 눈에 확 띈다. "경은아 부정언니 먼저간다, 걱정된다 무슨일없지"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어제 묵시아로 먼저 떠난 부정언니가 내게 남긴 편지다.
약속시간에 제때 나타나지 않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가는 중에 이렇게 편지를 남겼나보다.
작은 편지이지만, 참 감사하다.
묵시아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을까? 묵시아에서 못 만나더라도 산티아고에 돌아가서 꼭 봤으면 좋겠는데...
어제 꼬박 한나절을 지나 새벽 이슬 맞아가며 나를 기다려준 이 작은 종이가 너무도 좋다.
종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고이 접어 배낭 앞주머니에 넣는다.
#혼자 걷는 길...
고요하고, 적적하다. 사람 찾아보기 참 쉽지 않다.
워낙 산티아고에서부터 피니스테레까지 걷는 순례자가 적긴 한데,
피니스테레에서 묵시아까지 걷는 사람은 그에 비해 1/2도 채 안되는 것 같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인다. 흰 거품을 이며 부서지는 저것을 잡아보러 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있는 것 같아 포기하고 원래의 길을 따라 걷는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중에 또 부정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Muxia 12km 아직 갈 길이 멀다. 산중에 홀로 걷는 중..
언니는 언제 이렇게 돌을 모아서 놓았을까?
언니의 깜찍한 이벤트. 아마 자신을 위한 이벤트일 것이다.
가운데 노란색 풀꽃들이 사뿐히 놓여있다.
#복병을 만나다.
초반에는 까미노 지표를 찾기 쉬웠는데 가면 갈수록 까미노 방향을 찾는게 어려워지고 있다.
지도 없이 '지표' 만 믿고 걷는 길이라서 맞게 걷고 있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 저 멀리 집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지만 기쁜 것도 잠시...
언덕 위에 있는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멀리서 나를 보더니 크게 짖기 시작한다.
개가 큰 우리 안에 있으니 밖으로 나올 일은 없겠지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래도 평안했던 마음이 순간 뒤틀리면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개가 있는 우리에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난 순간 걸음을 멈출 뻔했다.
떠돌이 개인지, 누구네 속하는 개들인지는 몰라도,
덩치가 큰 개들... 늑대 몸짓만한 무섭게 생긴 개 2마리가 우리 속에 갇힌 개가 불러서 왔는지
언덕 위로 나를 마중 나왔다.
내가 여기서 등돌려서 돌아간다면 달려들지도 모르고,
어쨌든 길은 하나.
우선은 최대한 눈을 안 마주치고, 앞만 보고 걸어야겠다.
두근두근 떨리는 내 심장박동 소리를 얘네들은 알까 모를까.
친구의 부름을 받고 온 개 2마리, 그리고 우리 속에 갇힌 개 1마리.
총 3마리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드디어 그들을 지나칠 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앞만 보고 걷는다.
개들이 나를 주시하며, 무슨 냄새라도 맡는 듯이 킁킁 대는 것에
아예 무신경한 척 했다.
휴우우.
우선 무사히 통과.
그들이 나를 따라오는지 아닌지 궁금했지만, 뒤를 돌아보면 쫓아올까봐
계속 앞만 보고 걷는다.
까미노 지표에 따르면 마을 안 쪽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난 너무도 무서워서 마을 길을 버리고는 큰 길로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조차 무서우니까.
무조건 앞으로만, 2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제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개는 없다.
하지만 내가 등을 돌리는 사이 개가 성큼 내게 달려올 것만 같은 무서운 상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아-
아침까지만 해도,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책제목을 되뇌이면서, 그렇게 살리라 마음 먹었는데,
생명의 존재 유무가 달린 위험한 순간을 "사랑하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기엔
난 아직 내공이 부족한 것 같다. 또 그 개 옆을 지나가라고 하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쉽게 못할 것 같다.
뭐지, 왜 개들은 나를 보며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
내가 너무 냄새났나? 너무 이방인 같았나.
아니면 내 배낭 속에 있는 빵 냄새을 멀리서 맡은 건가?
어디로 뻗은 길인지 모른 채 그저 홀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도중에 다행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어 어떤 사람에게 묵시아 방향을 물었으나,
괜히 그 사람, 그 한 사람에게만 길을 묻고 선택한 것을 이내 후회하게 됐다.
국도로 접어 들어 2차선 가로수 길을 1시간 넘게 걸으면서,
조금만 더 가면 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뿌리치지 못하고
우선은 걸어가보고 있던 때였다.
어떤 봉고차가 멈춰 서더니, 운전사가 창문을 내려 내게 묻는다.
"어디 가는겁니까?"
"묵시아요."
"여긴 묵시아 가는 길이 아니에요. 길 잘못 들었어요. 이대로 계속 가면 피니스테레가 나와요."
날 놀래키는 못된 개들을 만나서 기운 쪽 빠진 것도 서러운데,
이 길고 괴로운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다니.
어쩔줄 몰라 망연자실해 하는 내 표정을 본 운전사는 더는 말없이 차로 오라는 시늉을 한다.
잠시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나, 옆좌석에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다. 차에 타도 괜찮을 것 같다.
걸어서 완주해야할 까미노인데, 이렇게 차를 얻어타다니. ㅠㅠ
자괴감이 들었지만... 정말 다시 길을 돌아갈 생각을 하니 차마 힘이 나질 않았다.
아저씨가 나를 데려다준 곳은 까미노 지표가 있는 곳.
이거 너무 감사해서 어쩌나.
"Muchas gracias!!"
엄청나게 감사하다며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이제 까미노 지표가 알려주는 방향대로 걷겠노라 다짐해보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Muxia 4.89..km
사람 구경하기 힘든 이 길. 무사히 묵시아까지 잘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중간중간 까미노 지표가 많지 않아서 길 선택이 신중해진다. 내가 잘 맞게 가고 있는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리 내가 여기서 소리친다 한들, 누가 알고 내게 올 것 같지도 않다.
중간에 또 길을 헤매서, 이번에는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야하나 싶었지만,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다른 방향으로 찾아보니, 다행이 까미노 지표가 있다.
한 시간 반 정도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길만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드디어, 묵시아!
얼마쯤 걸었을까. 까미노 지표가 산으로 들어가라고 나있다.
과연 이 길로 사람들이 얼마나 다녔을까. 나, 이대로 가도 길 안 잃어버릴 수 있을까.
혼자 걷기에는 음침하고 꺼림칙한 길이다.
벌목한 나뭇가지들이 하나도 치워지지 않은 숲길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다가
나무들 사이로 푸른 바다와 집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숲속에서 산삼이라도 찾은 심정이다.
심봤다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숲에서 해방되니 상쾌한 기분! Muxia 2.103km
그리고 묵시아가 정말 코 앞이다.
내 오늘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몸고생 마음고생했는가! 온타나스 가는 진흙길을 걷는 것보다 더 힘든 날이었다. 부정언니, 떠나기전 바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순례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래도 이렇게 아무 탈 없이 도착하니 참 기쁘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에서 주인공이 개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까지 까미노를 걸어오면서, 개에게서 심각하게 위협받는 적은 없었는데... 아, 한번은 있다.
사모스 가는 길에 개가 나에게 덤빌 태세로 심하게 짖어댔던 일. 그때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었지.
내가 까미노에서 아직 덜 배워가는 게 있는 걸까?
까미노의 마지막 날이 깔끔하게 마무리 된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알게 되겠지.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길이 내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정언니와 다시 만나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마자 눈에 띈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정언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텐데, 배낭과 함께인걸 보니 곧 떠나나 보다.
부정언니는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착각한 바람에, 오후 늦게 있는 버스를 탈 예정이라고 한다.
리셉션에 크리덴시알 도장을 받고 언니와 한창 수다를 시작했다.
언니는 내가 왜 어제 안 왔는지 걱정했다면서 묻기 시작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나는 언니가 길에 남긴 것들을 봤다며 알려주었다.
묵시아의 알베르게가 생긴지 얼마 안되서 깔끔하고 쾌적한 것 같은데, 2층으로 올라가니 침대가 거의 텅 비어있다.
사람들에게 많이 방해받지 않고 편히 쉴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다.
부정언니가 떠나고 나면 난 누구랑 얘기하지?
부정언니에게 빌렸던 돈도 갚고, 시내 안 쪽으로 걸어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왔다.
오늘 힘들게 걸어온 나를 위해서 근사한(?) 샐러드를 먹고 싶었다.
한 접시 가득차게 샐러드가 나왔지만, 빵을 주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빵 달라고 하니 아무말 없이 주는..
무성의한 바 주인. -_ -; 얘기 안 했으면 나만 손해볼 뻔 했다.
부정언니를 배웅하고, 언니가 일러준대로 도로를 따라 바닷가 옆에 있다는 성당을 보러 걷기 시작한다.
바닷가라 바람이 무지 분다.
간간이 차만 몇 대 지나갈 뿐, 도로며 인도며 조용하다.
흰 등대와 이윽고 보이는 성당.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성당은 화려하지 않지만 바다에 반사되는 빛과 어울려 충분히 아름다운 것 같다.
해가 질 때 성당에 비출 빛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성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를 매일 보고 살아가는 이와 성당의 기운은 늘 푸르지 않을까.
끝모르게 펼쳐져 있는 바다 너머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며,
세상은 정말 넓고 넓구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본다.
해가 지는 걸 보고 가면 좋으련만, 바닷바람 실컷 맞은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피니스테레로 이어지는 또다른 길.
이만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등대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날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셀카에 만족.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서 그나마 잘 나온 사진은 한 장뿐.
#
알베르게에 사람이 더 와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전히 썰렁하다.
일찍 잠을 청했으나 눈만 꿈뻑거리며 뒤척이는데 자동차 경적 소리가 썰렁한 공기를 가른다.
무슨 사고라도 있나?
#다음날 아침
오늘은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날.
여느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위해 배낭을 챙겨 길가에 있는 바 중 한 곳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에서 연속해서 한 장면만 보여주는데, 스페인이 유러피언 리그에서 최종 우승을 한 장면이다.
30분이라고 하면 과장하는 것 같지만,
정말 내가 바에 들어와서 나갈때까지 텔레비전에서는 같은 장면만 나오고 있다.
그래서 어젯밤 울린 자동차 경적이, 우승을 알린 경적이었구나.
오호. 이런 중요한 경기가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어디선가 스페인 사람들 틈에서 축구 경기를 봤을텐데.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흥겨웠을 시간에... 묵시아는.. 조용했다. 아니 묵시아의 알베르게가 무지 조용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서 다시 성당이 있는 해안가 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묵시아까지 오면 준다는 순례증서를 받고 싶어서 순례자 사무실로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문을 여는 날이 아니었다.
일요일, 월요일은 쉬는 날이란다. 뭐, 종이가 굳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혼자 의미를 두기로 한다.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나왔는데 기분이 묘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항상 가지고 다니던 짜리몽땅한 스틱이 없다!
그것을 마트 한 쪽에 세워두고는 깜빡 잊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뭔가 빠진 것 같았구나!
다시 가지러 가기엔... 그러기엔 내게 더이상 필요없는 물건이다. 아. 이로써 까미노가 진짜, 끝났구나.
그동안 함께 길을 나서준 스틱에게 작별인사를 하지도 못한 채 그냥 두고 온 것 같아 아쉽지만,
아담한 길이의 스틱이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이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혼자 와서 또 혼자 돌아가기.
내 생애 언제 다시 찾아오게 될런지 모를 곳이지만, 생의 순간 잠시 이곳에 왔다 갔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기로 한다.
비록 이곳에 오기까지 길이 험했지만 말이다.
성당 한바퀴를 돌고 나서 길가에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폐허로 향한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돌에 낀 이끼들이 나보다 훨씬 전에 살았을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알베르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후, 점심을 간단히 먹고 쇼파에 쭉 퍼져서 늘어져 있다가 밀린 일기도 쓰고.
그래도 버스 타기까지 시간이 남길래 알베르게에서 나와 뒤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본다.
개들은 어디서 짖는지 몰라도 나를 향해 짖는것 같다. 어디에 숨어서 짖는거니. 나참.
이거 간이 콩알만 해져서 어디 나다닐 수 있겠나. ㅠㅠ
바다로 둘러쌓인 묵시아. 피니스테레보다 더 작아보인다.
묵시아 알베르게의 방명록
알베르게로 다시 와서 짐을 찾고,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어제 도착해서 쓴 방명록을 사진으로 담는다.
알베르게 호스피탈로에게 인사를 하고, 이제 산티아고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간다.
Muxia로 오는 길. 나 혼자 걸었기에 꽤 적적했다. 언덕을 넘고 코너를 돌았을 때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커녕 무서운 개들이 있어서 힘든 길이었다. 개들이 있는 마을을 피해 도로를 따라 걷다 길도 잃고 헤맸다. 무척이나 지친 날. 그동안의 에너지를 이제 다 써버린 날. 이로써 나의 까미노는 끝났다. 다시 까미노에 온다면 Muxia에 걸어올 일은 없을 것이라며 짜증내며 걸었던 길. 이제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 다음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순례자의 일상과 다른 여행의 일상. 까미노, 그리고 까미노 친구들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잘 먹지 못해서 지친 것 같다. 산티아고로 돌아가서 뭘 해먹을까 고민중. ㅎㅅ ㅎ. 여기까지 오신 한국분들께 박수 x3, 짝짝짝!
#이제 정말 끝났구나.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 안에는 승객들이 얼마 없다.
며칠 걸려서 도착할 산티아고를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다니.
매일 걸어다니다가, 갑자기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니, 뭔가 낯선 느낌이다.
하긴... 이제 까미노는 끝났으니까.
운전수 쪽 가까이 앉은 할아버지가 말을 시작했는데,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운전사는 운전하느라 적당히 말대답해주고 말수도 있을 것을.
둘은 뭐가 그리 잘맞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운전사가 얘기하는데 정신이 팔려 혹시 사고가 나진 않을까 걱정이 될만큼.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무지 궁금하다.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버스 안.
차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영어가 들리고, 불어, 일본어 세계의 다른 언어가 귀에 들리면서
한국어도 들린다.
"무적함대 스페인이 영국을 꺽고..... "
어제 스페인이 우승한 경기 내용을 각국 나라에 퍼진 뉴스 한토막씩을 한꺼번에 들려주는 것이다.
아, 한국어.
아참, 난 한국사람이지.
별 생각이 없다가 내가 한국사람임을 생각해낸다.
이런 기분. 참 오묘하다.
일디즈입니다. >ㅅ <
어떻게 끝마칠 수는 있을까. 내가 순례자의 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것을 온전히 글로 옮길 수 있을까.
글을 제때 포스팅하지 못하고 미룬 날들이 많아서 스스로 자괴감에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결국에 이렇게 다 끝마쳐놓았네요. 많은 시간이 걸려서 말이죠. ㅜㅡ ㅜ;
산티아고로 돌아가서 찍은 사진 몇 개만 더 포스팅하면 2008년의 까미노 이야기는 마무리하게 됩니다.
이제 까미노 이야기는 더이상 포스팅할 일이 없을... 거라기 보다는.
제가 다시 까미노에 찾아가면 또 다른 이야기들을 쓰게 되겠죠? ^^;
시간이 지나고 난 지금,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 때,
까미노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용기를 갖고 한 걸음 내딛는 것.
그 한 걸음으로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다른 세상과 조우하게 될 때
두려움과 의심따윈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진다는 것을.
소중한 경험과 만남, 배움이 함께했던 이 여행을
저도 잊지 않고 잘 간직하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Buen Camino!
모두들 인생의 길을 잘 걸어나가 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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