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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이야기 37] 순례 33일째, 깔로와의 만남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37] 순례 33일째, 깔로와의 만남

Yildiz 2011. 12. 26. 00:35



소똥 냄새 가득한 마을, Olveiroa에 가는 길      2008년 6월 25일 수요일



순례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도 그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잠들기 애매하니, 나도 슬슬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먼 동이 터오는 아침. 이른 시각이라 사방이 어둡다.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걷다 보면 어떻게든 까미노 지표를 찾을 수 있겠지!
우선은 길을 나선다.



밤새 대지를 뒤덮었던 어둠이 점차 밀려나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위치와 색깔은 새벽의 비밀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동그란 태양의 이마가 구름 위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오늘은 33km를 걸어야 한다. 어제처럼 열심히 걸어서 알베르게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 

일찍 출발한터라 내 뒤를 따라오는 순례자가 없다.
게다가 앞서 가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건 또 뭐지.

어제는 혼자 걷는 동안 적적해서 이야기할 사람이 그리웠는데...
오늘도 또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진 않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혹시 누가 오나' 궁금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한 순례자가 저 멀리서 걸어 오고 있다.
아직은 간격이 있으니...

최. 대. 한! 멀어져야지. =ㅅ =;

괜한 심술이 나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아스팔트길을 끝으로 까미노 지표를 따라 산으로 들어왔다.

음침한 분위기의 숲길.
평지에서 걷던 속도로 오르막길을 걷자니 숨이 찬다.

의식적으로 속도를 줄이면서 쉬엄쉬엄 걷다가,

'설마. 아까 그 사람 벌써 여기까지 왔겠어?'
잠깐 쉴 겸 뒤를 돌아보고는

앗, 깜짝이야!!!
라고 소리지를 뻔 했다...

그 순례자가 어느새 내 뒤를 성큼 따라 잡은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걸어온거지?

무시하고 돌아설까 하다가 우선은 인사를 해본다.

"Hello!"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아서 영어로 인사했더니, 영어로 잘 대답한다.
그런데 그의 영어 발음이 생소하게 들리는게 많아서 정체가 뭐지? 싶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깔로다.

"까미노가 끝나면, 이탈리아에도 여행하러 갈거에요." 

"어디어디 갈건데?"

"아직 계획은 안 세웠지만,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이렇게 갈 것 같아요."

깔로는 베니스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며 놀러오라고 한다.
 

통성명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서 할 얘기가 없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 전에 산티아고에서 파울로 코엘료를 만났어요!"
이렇게 자랑해도 부담없을 것 같은 친구 같기에 사진을 보여주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데

깔로 왈,

"파울로 코엘료는 택시 타고 까미노를 했다던데?"
라는 농담을 진담처럼 한다.

작가가 직접 까미노를 걸어서 '순례자' 라는 책을 썼는데, 뭔소리지?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어리둥절해하자 깔로는 "몰랐었어?" 라며 계속 장난을 친다.

아하하. -_-;;


근처에 바가 있다는 표지판을 발견하곤 함께 바를 찾아 갔다.

도로가에 있는 작은 바의 야외석에 앉아 있는데 깔로가 주문한 홍차를 가져온다.
작은 주전자에 컵, 티백, 그리고 레몬 한 조각 더불어 나오는 Te con lemon를 내가 신기하게 쳐다보자 뭐라고 하더니 하나 더 주문해서 가져온다. 영어를 잘 알아들었다면 극구 사양했을텐데..

항상 바에서 꼴라까오나 커피를 마시다가 레몬즙을 첨가해서 마시는 홍차는 내게 있어 '신세계'다. 홍차보다는 녹차에 익숙해있는데다가 레몬 사용 용도는 그저 회 먹을 때 몇 번 짜본 것일뿐이었으니까.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 깔로. 신 레몬을 잘 먹는다.


처음에는 불청객이라 생각했던 이 순례자와 왠지 오늘 끝까지 함께 걸을 것 같다. 사실 그의 영어 발음이 군데군데 생소해서 잘못 알아듣는 말도 있지만, 그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그 재미도 잠시.
이야기할거리를 다 써버리자 길 위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


오늘 날씨가 화창하고 간간히 바람도 불어와서 좋지만, 문제는 길에서 앉아 쉴 곳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깔로에겐 그늘과 의자 따윈 아무 상관 없나보다.
푸른 들판이 있는 곳을 보곤 잠깐 쉬었다 가자며 배낭을 내려놓는다.



하늘에 둥둥 떠있는 하얀 구름과 함께 초록색 들판을 실컷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나도 풀 위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깔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벌러덩 눕는다.
난 혹시나 무성하게 자란 풀 사이에 똥이라도 있을까봐 염려가 되서 마음껏 눕지 못하겠다.
어제 미리 만들어놓은 샌드위치를 꺼내 아침겸 점심으로 먹는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풍경을 만났을 때, 열심히 사진 찍기만 했지 그 안에서 마음껏 쉬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풀밭에 누워보라는 깔로의 제안에도 계속 앉아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는 것에.



각오는 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지치는 날이다.
순례자들이 많이 걷는 길이 아니라서 길 위가 썰렁하기도 하고.
중간에 마을이 없어서인지 인적이 드물다.

눈에 보이는 길 끝에 다다르면 혹시나 뭐가 보이진 않을까.
오늘의 목적지가 보이진 않을까. 기대를 해보지만, 오늘따라 길들이 고무줄처럼 계속 늘어나는 것만 같다.

깔로가 나보다 앞서 걷거나,
내가 그보다 더 앞서 걷거나 하면서 별말 없이 걷는중이다.

하지만 누가 먼저 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기미다. 
지루하고 힘든 길에,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게 힘을 주니까.

간혹가다 깔로가,
"너 쉬었다 가고 싶니?" 라고 몇 번이고 물어보지만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싫어요."라고 답한다.

나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잠시 쉬겠다고 앉아버리면 걷기 싫어서 못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은 알베르게에 빨리 도착해서 늘어지게 쉬고 싶은 마음뿐.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배낭을 던져버리고 그만 걷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오늘의 목적지 Olveiroa에 들어섰을 땐 너무도 기뻤다.
올베이로아Olveiroa는 어제 머물었던 마을보다 훨씬 작은 곳이라서 알베르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알베르게 문이 열리지 않아 일찍 온 순례자부터 차례대로 배낭을 놓고 줄을 서 있다.
깔로와 나도 줄을 선다.

이제 곧 침대를 배정받고 편히 쉴 수 있겠군!

언제 투정부렸냐듯이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니...  어쩌면 마을 입구에서부터 계속해서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소똥 냄새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묘한 웃음 바이러스가 소똥 냄새 성분에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도대체 어디서, 왜 이렇게 소똥 냄새가 심하게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냄새가 강해서 킁킁 거리는 것도 포기했다.

30분정도 더 기다리자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나와 깔로는 1층에 있는 방으로 와서 침대를 골랐다.
나는 위층, 깔로는 아래층으로.

일찍 샤워를 마치고 마을의 바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깔로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상인에게서 오렌지와 와인을 한 병을 샀다. 이탈리아에서 온 다른 순례자도 함께 합세해서 와인을 마셨다.


깔로와 또 한 명의 이탈리아 순례자.



한가롭게 휴식하고 있는 순례자들


깔로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만난 사람 중에 한국어에 관심을 갖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깔로는 좀 특이하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 기본적인 표현을 묻는게 아니라 엉뚱한 표현을 묻는다.

"있잖아, 저기 구름 보이지? 저게 소 같다, 라고 한국말로 뭐라고 해?"

"'저 구름 소 같다.' 라고 해요."

음, 알려주긴 했는데, 발음이 영.. 아니다.

"더 구릉 조오 가으따."

"저 구름 소 같다."

"더 구릉 쏘오 가따."

"(......)"

아무래도 누가 깔로 발음을 잘못 들으면 욕하는 줄 알 것 같다.

소를 다른 예제로 바꿔야지. 뭘로 바꾸는게 좋을까?
개... 개? 아니야. 강아지로 알려줘야겠군.

"깔로, 한국 사람이 당신 발음을 들으면 오해할 것 같으니까
절대로 '소' 얘기는 하지 말고, '강아지' 로 한번 바꿔봐요.

저 구름 강아지 같다. 이거 외워봐요."

깔로는 이외에 내가 알려주는 한국어를 노트에 적고는
본격적으로 실전에 돌입했다.

아까 산 오렌지를 들고 부엌에 있는 선희언니에게로 가서
"머글래?" 라고 시도하는 깔로.

"응" 대답하는 선희언니.
그래서 깔로는 선희언니에게 오렌지를 넘겼다.

그리고 또다른 한국인 발견!
박진순 님께 다가간 깔로는 노트에 적은 한국어 표현을 시도해보는데...



아저씨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사람 어느나라 사람이야? 신사같이 생겼네."




깔로의 엉뚱한 행동에 정말 마음껏 웃었다.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 숀탈 할머니!


생각지도 못한 순례자 발견! 숀탈 할머니!!
어느 순간, 할머니를 놓친 바람에 못 뵌지 일주일도 넘은 것 같은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할머니는 이미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산티아고에 '걸어서' 가는 중이시란다.

숀탈 할머니의 노란색 파자마는 볼 때마다 탐난다. (꿀꺽)



어찌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타를 가지고 있는 순례자가 있다.
스페인 사람인데, 말이 안 통해서 진짜 기타를 들고 까미노를 걷는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의 잔잔한 연주를 듣는게 좋다.
그러고 보니, 순례자의 길을 걷는 동안 제대로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었네.


내 수면양말을 가지고 장난치는 깔로.



정은언니


저녁이 되자, 바람이 쌀쌀하기도 하고
몸이 나른해지면서 피곤함이 밀려온다.

이만 자야겠다 싶어 방으로 들어왔는데, 벌써부터 잠을 청하는 순례자들이 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되어간다.

내 침대로 올라와 침낭 속으로 쏘옥 들어와서 일기를 쓴다.
스페인 아저씨의 기타 연주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창문을 통해 기타 소리가 들어온다.
밖에서 기타 연주를 들었을 땐 굉장히 좋았는데, 방 안에서 잠자려는 사람들에겐 이 소리가 소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리 큰 소음은 아니니 괜찮겠지...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모두에게서 이해를 바랄 순 없을 거고.
그래서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는데, 옆 침대를 쓰는 커플이 잠자기 전에 찐~한 키스를 한다.
괜시리 코 끝이 시렵다.

일기를 다 쓰고 자려는데 깔로가 방으로 들어왔다.

내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내일도 함께 걸을까? 괜찮다면 아침에 같이 출발하자."
"뭐, 그래요."

"그럼, 잘자."

내일은 피니스테레에 닿는 날!
까미노의 끝도, 정말 머지않았구나.



오늘의 스탬프!

 


Negreira - Olveiroa = 33km


오늘의 지출!

숙소 3 + 까페 3.70 = 6.70유로






"해는 뜨거웠지만 간간히 그늘과 바람이 있어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이 날의 일기 마지막 줄에 썼네요. = )

오늘 하루, 무척 추웠지만 그래도 겨울은 찬바람 없이는 심심하죠. 
봄이 겨울보다 좋긴 하지만,
겨울이라서 누릴 수 있는 건 즐겨야겠다는 마음가짐.

계절의 겨울이든, 인생의 겨울이든.
뭐든 지내야하는 시기가 있으니까요.

스스로의 행복을 더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ㅎㅅ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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