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34] 순례 31일째, 마법이 일어나는 도시, 산티아고.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34] 순례 31일째, 마법이 일어나는 도시, 산티아고.

Yildiz 2011. 11. 21. 17:34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만에 모처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이제 슬슬 유럽 여행 일정을 세워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모두들 쿨쿨 자고 있는 방에서 나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순례일정을 모두 마치고 난 후 스페인 도시 몇 군데를 찍고는 바르셀로나를 마지막으로 동유럽에 갈 생각이다. 영어로 가득한 저가항공 사이트에 접속하여 고민 끝에 비엔나로 목적지를 정한다.

 

처음 사보는 저가 항공이라 온 신경을 곧두세워 구입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비쌌지만 더 미루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늘은 하루 종일 산티아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내일부터 피니스테레를 향해 걷기 시작할 것이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산티아고를 떠나야 한다는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 순례길 나날 중 오늘을 가장 중요한 날로 손꼽고 싶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게 맨 처음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마르코스를 못 본지 3주가 지났고, 노라는 또산또스Tosantos에서 만난 이후로 종적을 알 수 없다. 2주 전에 헤어진 루이스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지금 산티아고로 오고 있거나 이미 와서 쉬고 있다면 오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산티아고를 끝으로 모두들 나름의 일정을 갖고 있으므로,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스페인에서 만남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산티아고 시내 곳곳을 무작정 돌아다닐 생각이다.
길을 헤매도 좋다. 걷다가 지쳐도 좋다.
친구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잘 가라고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알베르게에서 더 늦게 출발할까 하다가, 문득 버스터미널에 한번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피니스테레에 가는 친구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이렇게 찾아서 만나야 하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낯선 곳이 주는 어색함과 함께 내 선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막상 버스터미널에 오니, 어디서 친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정말 만나게 될 인연이라면 까미노 길이 알아서 안내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친구한테 이메일 하나 안 보내고 있었으니... 여기까지 일부러 발걸음을 한 건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른 방식인 것이다.


'그래... 아직은 길 위에 있으니까 좀 더 지켜보자.'



"까미노에 있는 한, 원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미국인 순례자 아이린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길을 믿어보기로 한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산티아고 대성당 방향으로 이어질 듯한 길을 선택해 걷는다.
그러다 아침에 몬테 데 고소Monte de Gozo에서 출발한 어르신들(빅토리오 부부, 한국인 부부, 마리 아주머니)을 길에서 만났다.

까미노가 주는 만남이란 참 즐겁다.


산티아고 대성당




아직 아침 미사를 할 시간이 아니라서 성당 문이 잠겨 있다. 성당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성당 뒷편에 있는 바에 들어가 초콜라떼 꼰 츄러스를 시켰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다시 성당 앞으로 오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


박진순 부부님, 한국인 아저씨(이인영님), 정은언니



미사에 참석하러 온 순례자들 뿐만 아니라 지금 막 도착하는 순례자들.
그리고 관광객들까지 한 데 섞여 성당 앞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


미사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오른쪽 계단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로빈! 로빈이다!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소Vila franca del Vierzo에서 만난 이후 처음 보는 로빈. 참 오랜만이다.
차림새를 보니 오늘 막 도착한 것 같진 않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슬퍼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왜 그런 표정 짓고 있냐' 고 묻는 대신
그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다가가 포옹을 한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다.
로빈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캐나다 커플이 로빈을 발견하고는 어느 틈에 다가왔다.

시작되는 원어민들의 대화...

로빈에게 간다는 인사를 차마 못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인 아저씨- 이인영님...!!


성당 안은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혹시나 친구를 찾게 될런지 고개를 쭉 빼들고 둘러보지만, 보고 싶은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밖이 너무 소란스러워 무슨 일이 났나 나와보니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말이다.






이어 미사가 시작되었다.


 


 

성당 한 구석에 순례자의 배낭들.

 



까미노의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사람들.
먼 길을 걸어 당도한 이곳에서 받는 미사는 그 어느 때 보다 특별할 것이다.  



차례로 줄을 지어 성수를 받는 순례자들. 나는 줄을 서는 대신 맨 앞으로 와서 사진을 찍는다. 
군의 사진을 잘 찍고 싶었는데 여러 모로 부족한 사진. (위 사진 가운데에 군. )

아직은 나의 까미노가 끝났다는 걸 실감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우선은 의식을 바라만 보는 걸로 마음 속에 담아 놓는다.
다음에 와서, 그때는 꼭.



미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나는 이 경건한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분이 꿀꿀해졌다.

난 너무 내가 원하는 대로만 인생의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고,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모두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구나.

내가 보고 싶고 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시간을 무작정 끌여 당겨 내게로 바로 오게 할 수는 없는 법.
그들은 그들만의 까미노를 하고 있기에 내가 이렇게 투정 부려서는 안되는 데 말이다.

절대적인 수치로 따져보면 우리에게는 하루라고 일컫는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지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개인이 살고 있는 시간은 그 사람만의 고유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까미노에 대해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기는 커녕,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침울하게 앉아 있다 보니 미사가 끝났다.


성당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과 헤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미사가 끝나고 한국인 순례자들과 기념 촬영.


마놀로, 곤치 부부. 빅토리오부부와 사돈지간이다.



이탈리아 순례자들. 곤치 부부만 스페인 사람.



나도 껴서 한 장 찍었다!


더이상 못 만날거라 생각했던 스페인 부부- 마놀로, 곤치 부부를 다시 보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사진을 찍고 나서 빅토리오씨에게 남은 일정에 대해 물었다.

"이제 걷는 건 정말 끝났어. 내일 버스 타고 피니스테레에 갈거야.
 이탈리아에 오게 되면 연락해!"


(나중에 알게된 에피소드 - 아내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소방관 옷을 입으셨다는 빅토리오씨.ㅎㅎ)


이제는 까미노에서 만난 이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으며 사소하게 건네는 웃음들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간절해진다. 

혼자서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
홀로 걸어야 했던 길 위에서 이들이 함께 있었기에 순례길이 무척이나 아름다울 수 있었다.
,
서로를 잘 알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을 열고, 다가갔었던 날들로 인해 이렇게 좋은 여행을 하게 된 것 같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빅토리오씨 부부와 포옹을 하고 볼인사를 하면서 내 마음을 전했다.



장 한 구석에 모여 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군도 함께 있다.
산티아고에 오면 꼭 한번 가보라는 레스토랑 "까사 마놀로" 에서 한국인 아저씨, 정은언니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하고 군에게 다가갔다.

미사 도중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군과 나누고 싶어서다.

레온에 닿기 전 마을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 군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까미노는 인생과 같아. 까미노에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어쩔 때는 한없이 기분이 좋다가도, 어쩔 때는 무척 우울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도 그와 같지. "


막상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어느 정도 공감을 했지만 완벽하게 들어 맞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배경이 대부분인 까미노가 실제 복잡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군, 그때 뿌엔떼 빌라란떼Puente Villarante 식당에서 했던 말 기억나요? 까미노가 인생과 같다는 얘기.. 정말 맞는 말 같아요. 미사 중에 깨달았어요. 우리 모두는 사실 혼자라는 것을요. 같이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까지 홀로 걸어왔네요..."

"리, 내가 어제 말했던 것 기억나? 갈리시아의 그 숲을 지나면서, 내가 어렸을 때, 소녀였을 때,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이 있기까지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는 거."

"이런 시가 있어."

군이 어떤 시를 읊어준다. 영어는 아니고, 독일어같다.
바로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저 귀를 활짝 열고 그녀의 음성에 빠져든다.

"독일의 어느 시인의 시인데... 혼자 말을 타고 가든, 둘이 가든, 여럿이 말을 타고 함께 가는 여행에서 말에 안장을 올리고, 그걸 타고 가고 말에서 내려오는 것은 오로지 자신 홀로 한다는... 그런 내용의 시야."

이 순간을, 군의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시를 적어 달라며 일기장을 건넨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잠시 조용한 곳에서 흐느껴 울고 싶다.

군의 눈에 맺혀 보이는 눈물은
내 눈에 맺힌 눈물 때문인건지, 뭔지 모르겠다.

성당 안에 조용한 기도실이 있었던 걸 생각해냈다.
그곳에 가야겠다.

"난 다시 성당에 가 볼게요."



담한 크기의 기도실은 유리문으로 바깥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통로에 비해 깊은 침묵을 지킬 수 있는 방이다. 방 안에는 기도를 하러 온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다.

방 안 오른쪽에 있는 의자 옆에 배낭을 내려 놓고 자리에 앉는다.
두 손을 지긋이 마주 잡고, 눈을 감으니 밖에서 참았던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온다.

태아였을 적에, 탯줄로 엄마의 품 안에 이어져 있던 삶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홀로 살아가야 하는 삶.

그래도 가족들은 피로 이어져 있으니까. 가족들과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도, 동생도, 할머니도... 모두들 저마다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생길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걷는 이는 오로지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자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사방이 깜깜한 터널 같이 느껴졌다.

그 터널 안을 쉼없이 걸어 왔고 또 걸어 가고 있는 나.
깊고도 긴 터널 속의 짙은 어둠을 헤치면서 지금껏 잘 버텨왔구나.

한치 앞도 모를 인생의 터널이 끝모를 곳으로 이어져 가다가 광활한 우주로 변모했다.
나의 상상으로는 그 크기와 존재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그 우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고독하다.
사람들과 이어져 있던 인연의 줄들이 가위로 똑 잘라진 기분이다.
너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 
나의 제 존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서러워졌다. 어쩌면 엄살일 수도 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을 ....
홀로 나아가야하니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차오른다.
여과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 나온다.

이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는 구나.
자신의 고독함을 보듬어줄만한 전지전능한 존재를.

그렇게 열심히 울고 있는데,
옆에서 한국말이 들려온다. 처음 보는 한국인 순례자다.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기가 뭐했는지 옆에서 고민 했던 모양이다.

"혹시 **씨 알아요? 제가 지금 가야하는데, 이게 그 사람 짐이거든요. 만나게 되면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내가 갖으라며 쇼핑백을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 이젠 청승 맞게 우는 것도 멈춰야겠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도실 정면에 있는 성모마리아상을 바라본다.

그녀가 꼭 내게 묻는 것 같다.

'그래, 세상에 너의 존재가 어떤 줄 알게 되고,
홀로 사는 삶의 고독함을 맛보았으니, 이제는 나를 믿어보겠느냐.' 라고.

순간의 망설임.
하지만, 난 종교를 신실하게 믿을 만큼 잘 알지 못한다.

'후에 제가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면,
미래의 어느 순간에 믿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저를 믿고 살아가 볼래요.
가끔씩 기도하겠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힘을 주세요.
지켜봐주세요.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오늘 마지막으로 보게 될 까미노 친구들,
그들의 삶을 축복해주세요.
한국에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그들이 늘 행복하기를.

그리고 앞으로 남은 저의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기를 빌어요.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개운하다.

혼자 걸어가야 하는 삶이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삶.
철저히 혼자 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과 생의 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 그저 순간을 잘 살아가야할 뿐이다.



당 밖은 여전히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광장 안은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한국인 아저씨와 정은언니랑 까사 마놀로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게 이제야 생각났다. 
그들이 있던 자리를 살펴 보니 없다. 그럼 식당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성당 입구 계단에서 내려와 사람들 틈속에 끼여 두리번 거리다가
순간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주변의 소음이 그새 온데 간데 사라지고,
사람들 틈 사이로 유독 한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세상이 온통 하애지면서, 멀리서 오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에.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나?!
믿기지 않아 눈을 꿈뻑거린다.

틀림없이 죨드다.
순례 2일째, 라라소냐 가는 길에서 만난 헝가리 순례자, 죨드.
하루에 60km씩 걷기도 하고 워낙 잘 걷고 빨리 걷는 사람이라 헤어진 이후로 아예 못 볼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죨드는 마트에 다녀왔는지 두 손에 봉지가 가득하다. 

난 너무도 기뻐 그의 이름을 부른다. 

헤이, 죨드!

헝가리 순례자, 죨드. 헝가리에서부터 걸어왔단다.

 



나를 발견한 죨드 또한 무척 기뻐한다.

"난 네가 벌써 집에 갔을줄 알았어. 피니스테레에 다녀온거야?"

알고 보니, 그는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피니스테레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어와서 며칠 쉬고 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라고 인정, 또 인정.

나는 내일부터 피니스테레로 향할 예정이라하니, 역시 까미노 베테랑답게 길을 알려준다.

성당 앞에서 만난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 지나가는 스페인 사람에게 부탁한다.


 


죨드는 사진을 보곤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또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죨드가 덥석 내 손을 잡고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하하.
난 당황해서 그냥 웃기만 했다.




죨드와 헤어지고, 나는 레스토랑 '까사마놀로' 로 왔다. 자리가 만석인지 가게 입구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몇명 서 있다. 식당 안으로 들어오니 감사하게도 일행이 이미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메뉴는 많지 않아서 간단해 보였지만 스페인어만로 적힌 메뉴라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감이 오는 대로 골라 시켰다. 



정은언니와 아저씨는 스프를 시켰고, 나는 샐러드를 시켰다.




샐러드에 올리브 잔뜩. 샐러드 오일로 맛깔나게 보인다.




샐러드를 다 먹기도 전에 메인 요리가 나왔다. 뭔지 잘 모르지만, 맛있게 먹으니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신다.

"어디 가서도 잘 살겠네. 잘먹네 진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이번 점심은 아저씨가 사주셨다. 덕분에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하고 카운터에 있는 직원 혹은 사장일지도 모를 사람에게
"진짜 진짜 진짜 진짜 맛있네요!" 몇 번이고 얘기한다.

기념으로 가게 명함을 2개 챙겨서 명함 뒷면에 가게 스탬프를 한 번 찍고, 또 한번은 크리덴시알 뒷면에다가 스탬프를 찍었다.



일 피니스테레로 향하려면, 어제 묵었던 숙소보다는 성당 가까이에 있는 숙소를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죨드가 머물고 있다는 알베르게는 어제 못 찾았기에 오늘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아무래도 아저씨가 어제 묵으셨다는 알베르게가 낼 아침에 출발하기 좋은 지점일 듯 싶다. 

아저씨는 정은언니와 내가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신다.
성당 뒤쪽으로 길을 가다 한 구석에 앉아 있는 이탈리아 순례자를 만났다.

시도때도 없이 들이대는 내 카메라에 익숙해진 그녀들.
내게 예쁜 미소를 지어준다.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티나!


큰 길 건너기 전 아저씨와는 인사를 나누고 정은언니와 나는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언덕 위에 있는 건물을 향해 걸었다. 올라가는 길이 은근 멀고 경사져 있어서 힘들게 왔다. 과거에 신학교였는데 알베르게로 개조를 했다고 한다. 

리셉션으로 와서 크리덴시알에 도장도 찍고, 하루 숙박비 지불 하자 호스피탈로가 이 넓은 알베르게의 시설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워낙 넓은 곳이라 내 방이라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약간 겁이 났다.

귀를 쫑긋 세우며 호스피탈로의 말을 듣고 있는데, 누가 자꾸 날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럴수가.

마르코스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산티아고에서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 만났어. 너 마저도."

마르코스와 나는 너무도 반가워 포옹을 한다.
그의 머리와 턱수염은 제법 자라 있어서 3주 전에 봤을 때 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아까 성당에서 인연을 내 마음대로 만나고 싶어하던 욕심을 버렸더니, 지금은 그를 보는게 덤덤하다.
산티아고 길에서나 마주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다.

마르코스는 그동안 어떤 친구들을 만나며 까미노 길을 걸어왔을까?
어쩌면 마음 잘 맞는 친구와 온종일 수다를 떨었거나,
아니면 나를 만나 반가움이 커서인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런지

그의 영어회화 속도가 예전보다 1.5배, 아니 2배는 더 빠르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계속 '뭐라고?' 라고 묻기는 그래서 그냥 듣기만 한다.

알베르게에 대해 열심히 소개해주는 호스피탈로의 목소리가 마르코스의 큰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그 날 나헤라Najera에서 머물기로 하지 않았어요?
어디로 간 거였어요?"

"나헤라Najera에 도착해서 마트에 들러 먹을 거랑 와인을 사서 나왔는데
노라를 만났어. 노라와 얘기하다 보니까 다음 마을까지 가게 됐네."

마르코스는 성당에서 큰 향로를 흔드는 의식을 봤다며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도 보여준다.

아, 이게 바로 군이 보고 싶어하던 건데.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영상으로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누굴 만났는 줄 알아?"

사진을 한 장 보여 준다.

"세상에!"

사진에는 마르코스와 파울로 코엘료가 나란히 서 있다.

"오늘 아침에 성당 앞 호텔에서 파울로 코엘료를 만났어."

난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서 있는다.

"좀 이따 파울로 코엘료의 행사에 초대 받았어.
너도 갈래?"










웃고 슬퍼하며 울고,
다시 활짝 웃었다가 또 울고.

조울증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루에 여러 감정들을 느꼈던 날이었습니다.

마법이 일어나는 곳, 산티아고.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이 제 글을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들진 모르겠지만.

저에게 만큼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날 중에
많은 것들이 응축된 날이었어요. 죨드를 만나게 된 순간에는 세상이 정말 새하애졌었고,
마르코스를 만나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을 때.

여행을 떠나기 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진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게 일어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죠.

어떻게 일들이 그리 딱딱 맞춰서 일어났는지.
여행 가기 전에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책 마지막 장 구절이 생각나더라구요.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할 때를 거스르지 못하고 제때 그곳에 이른다는 말.

최대한 그때의 느낌을 살려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양껏 쓴 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렇게 하나 둘씩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니,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를 만났다는 '사실' 보다
까미노 여행 자체의 과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글을 써 왔습니다.

우연의 일치...
정말 세상엔 우연이란 없는 걸까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