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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멀리 뛰기] 이병률 대화집

일디즈 Yildiz 2017.03.05 22:27

 

처음에는 이병률 작가가 쓴 에세이집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병률 작가의 팬이라면 한번 물어보고 싶었을만한 질문도 있고, 출판 트렌드나 같은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묻고 싶을 만한 질문들이 있었다. 소소하게 읽어내려가기 좋았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과 대화들이 많이 있었다. 나중에 쉽게 찾아 읽고 싶어서 그대로 포스팅하련다.

* 참고 .(숫자) 는 책 쪽수. 질문)은 인터뷰어의 말, - 는 이병률 작가의 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골랐기 때문에 내용이 더 궁금한 사람은 책을 찾아서 읽기를 추천함.

.54

- ... 누군가가 좋아지고 그 사람에게 뭔가를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래서 요리를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인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예술은 그냥 사랑의 감정이랑 비슷한 거예요.


.55

질문 ) 저처럼 책을 만들고,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하는 후배에게는 무슨 말씀을 해주세요?

-... 그치만 삶이란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건 어느 정도 결정된거니까요. 예술가의 길이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요. 굳이 하나를 얘기하자면, 큰 '결핍'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문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굉장히 멀리 있다는 거예요. 문학을 시작하더라도 끊임없는 결핍과 실패와 좌절과 무시, 열패감. 그 속에 있어야 하고 그걸 계속 겪어야 해요. 적당한 정도로나마 마이너리티적인 성향이나 또 고생스러운 것을 몸으로 또 정신적으로 겪었으면 합니다. 거기에 재능이 있고, 노력까지 한다면 당연히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죠. 분출하듯이.


.62

-.. 시간이 흘러도 관심의 무게가 사라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려요. 시간이 흘러... 자신이 정한 온도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온도계가 마음을 여는 거예요. 우리처럼 글 쓰고, 책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이 생명이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 관심이 조금, 있는 사람 정도로 할게요.

.65

- .. 질문은 결국 그 사람이 누군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66

-... 그래도 그 힘겨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그런 사람들을 지나고 나서야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는 것 때문이에요. 확률을 조이는 거죠. 아, 그리고 그런 느낌도 지나가더군요. 단어가 짧은 사람은 결국 매력이 없구나...... 단어 역시도 그 사람의 호감도를 결정하는 구나... 그런 생각들이요.


.70

-... 그게 습관이란 말로도 요약되겠는데 몸에 밴 것을 돌아보면 내가 누구인지 보인다 그 말입니다. 내 몸에 이기를 가득 채워놓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다움을 느낄 수조차 없는 딱딱한 막대 상태가 돼요. 조금만 권한이 생기거나, 조금만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굉장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살죠.


.71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왜 그렇게 치우쳐 지내야만 했을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고, 자기 실력도 중요합니다. 사람을 알아가겠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인간이라는 그 사실을 잊는다는 건, 그건 비극이지요.


.82

-... 눈치만 봤던 시간들도 있었겠죠. 매순간마다 또 며칠씩 불안했던 적이 많았어요. 두려웠던 건 '나는 어떻게 살까?'하는 터질 것 같은 막막함 때문에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했을라고요. '사는 건 항상 이렇게 무서운 걸까.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이 넘으면 그때는 무섭지 않게 될까' 하고요. 그러고 보니 십대부터 삼십대까지 불안하고 동거를 했었네요.


.88

-문학하려는 사람이 너무 문학에만 젖어 있는 것도 문제지요. 요즘처럼 받아들일 것이 풍부한 시대에. 자신의 이런저런 한계를 보고 자신의 재능을 이곳저곳에서 마주쳐야죠. 뭐든, 그것이 문학이든, 요리든. 저는 좋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괜찮은 교장을 하겠어요. 둘 다 하려면 조금 바쁘겠지만.


.88-91

질문) 책을 쓰시고 강연을 하시다보면 젊은 독자들을 자주, 많이 만나게 되잖아요. 출판사에서 함께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젊구요. 어떠세요? 글을 쓰실 때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세요?

-글을 쓸 때 기준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 글은 엉망인 거겠다, 이렇게요.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 객관적인 통계를 의뢰하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쉽게 평균치가 나오는 곳이에요.

.... 좀더 디테일한 기호나 취향을 가지고 살아도 모자란데 개인한테 강력한 한방이 없어요.

그게 결국 그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 자기를 만드는 시간들, 자기를 바라봤어야 할 시간들을 가지지 못했으니 '유니클로' 같은 외모를 한 청춘일 뿐인 거죠. 스스로한테 '안녕'하고 인사하는 법이 없어요. 대신 옷을 사거나 화장을 하거나죠.

... 굳이 자기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가 아저씨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어요.

.. 혼자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갖느냐가 결국 그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외로움의 세포'를 잘 다스리면 괜찮은 사람, 나은 사람이 돼요. 이건 명백히 확실해요.


.137

질문) 결국 문학은, 그것을 이루는 문학의 말은 돌아봄에 있는 것 같아요. 나를 반성하는 것, 그리하여 남을 살피는 것, 남을 위하는 것.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세요?

- 회귀하겠다는 본능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 내가 잘못 생각해서 버린 것에게 우린 돌아갈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길을 잃었고 참담했었고. 그때마다 스스로 최면을 걸었어요. 돌아갈 곳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말이죠. 우리 삶에 기회가 있다면, 어디든 돌아갈 기회가 있다는 거겠지요.

.148

질문) 여행 갈 때 가져가는 게 있는지요?

- 여행을 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것을 많은 분들이 자주 묻는데, 나라면 좋은 기억 장치를 가져가겠어요. 좋은 기억 장치라는 게 기술적인 뭔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비운' 상태여야죠. 텅 빈 상태라 잘 들어앉거든요. 외로움이나 결핍이 있는 상태처럼, 많이 비운 상태로 가는 것. 많이 소진된 상태로 가는 거요. 그래야 잘 흡수할 수 있어요. 그럴 때일수록 웬만한 것들이 아름답고, 소소한 것들이 고맙죠. 정신적으로 결핍도 없고 영양 상태도 너무 좋은 나라면, 가서도 잘 먹고 잘 쇼핑하고 잘 쉬고 오면 그만이겠죠. 흡입할 상태 말고 흡수할 상태의 나를 데려간다면 많이 가져올 거예요. 뭐든 가지러 가잖아요. 거기에 나를 다 쏟아 붓고 오는 게 여행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말이 하기 싫어서 떠난 걸 수도 있겠지만 어린왕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낯선 이에게 말을 붙이기도 해야겠지요. 우연히 마주친 어린왕자를 놓치면 안 되니까.


.150-151

질문) 그런 질문이나 부탁 많이 들으시죠? 여행을 가고 싶어요,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어디를 가요, 그곳에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 ...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야죠.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면 왜 여행을 가려고 하는지부터 설명해야죠.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여행이 사람들이 좋다는 곳을 가는 거라곤 해도, 한 번쯤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을, 바로 '그곳'을 정하는 선택이, 그 시작이 여행의 재미인데 그걸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걸까요. 자기가 무엇에 열려 있다면 몸도 머리도 그쪽으로 열려지게 되어 있어요. 여행의 경우, 목적지가 열려 있을 것이고, 세상 어딘가에 어떤 인연이 열려 있게 돼요. 여행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런 운명이 조합되어 있는 거예요. 저에게 여행지를 묻는 사람한테 '그럼 여행을 가지 말라'고도 해요. 아직 그 사람에게 여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요.

.. 여행을 가지 않는 사람도 있어야죠. ... 여행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여행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도 이 세상엔 있어요.


.161

-.. 여행을 많이 다니는 건, 역시 피의 핑계를 댈 수밖에는 없는데 그 다분한 방랑벽으로 혼자 떠난 곳에서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그 안에서 시를 생각하고 시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시간이 '의식'이겠죠. 의식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절대적으로 '혼자' 있음으로 해서 예민해져 있는 시간,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시가 스며들기를 기다린다고 할까요.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리고 인류의 많은 시인에게 그러한 것처럼 시는 오는 거예요. 성큼 먼저 가 있어도 안 되는 것이고, 끌어당겨서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기다리는 일일 겁니다. 마치 삶처럼 말이죠. 기다리다가 지치기도 하는 것이고 무언가가 와도 내가 온 것을 모르고 그냥 놓치고 마는 것이겠지요. 그것 또한 삶처럼 말입니다.


.165

질문) ... 작가님의 글도 그런 바람 같아요. 이병률의 모든 시가, 모든 여행 산문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거 같아요. 바람의 느낌. 글을 쓰는 건 어떤 일인가요.

- 글을 쓰는 건 사는 것하고 똑같아서 '안으로 멀리 뛰기' 같은 걸 수도 있어요. 글을 쓰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외로운 일이지요. 미친 짓이구요. 그러다 죽을 만큼 기쁜 일이구요.


.166

질문) 산다는 것의 막막함 앞에서 중심을 잡는 일도 어렵습니다.

-사는 것은 순례라는 생각을 합니다. 멋있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고, 또 얼쩡거리고 있고, 거기서 재미든 의미든 뭐든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하지가 않아요.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방향을 만들게 하고, 지금보다는 나은 것을 갈구하게 만들어요. 걷고 만나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의 키를 키우니까 그 모든 게 순례지요.


.168

-.... 안 해 본 게 없다는 선언 같은, 그때의 그 기분이 지금까지 저를 계속 지배하고 있어요.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기억이에요. 그조차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건 너무 비관적이잖아요.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과 사람에 대한 기억들, 그것들은 내가 죽어서도 세상의 그늘을 만들거나 바람을 만들거나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습니다. 그 기억하는 중량이랑 부피가 '위대한 정도'라면 좋겠어요.


.168-169

질문) ...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끝이 있다는 느낌. 끝나는 것에 대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내가 어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면... 나를 좀더 의심하려고요. 하고 싶은 게 분명 있는데 도무지 하지 않는 나를요. 하물며 공원 같은 곳에서도 벌렁 눕고 싶은데 사람들이 볼까봐 눕지 못하는 나를... 의심하려고요.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 일인지를 반성해야죠.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했으면 해요. 아직은 무엇인지. 누군지도 모를, 그 모두이며 수많은 것들을요. 죽음 앞에 아까운 것은 없어야죠. 무겁더라도 뒤돌아볼 것이 많아서 무거운 정도.


.183

질문)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글을 가지고 책을 편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점이세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쓸 수 있는 시각을 가졌는지,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지, 더 중요한 건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지를 봐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한테 관심이 있으면 안 보이는 것까지를 보게 되지요. 자기한테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거나 자기 세계에만 엄청난 것들을 쌓아두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가든 실패하겠지요. 가벼운 에세이를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는 물론 남의 이야기를 쓰더라도, 자기 안에 꼭꼭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씨앗이 발아를 못해요. 출판 일을 하면서 그 점을 많이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어떤 원고의 방향을 평가할 때도, 글을 손볼 때도 그런 부분이 중요했어요.


.183-184

질문)출판 트렌드도 예측이 가능할까요?

-.. 이제는 '자존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어설 기운을 책에서 찾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책에서 찾는 거죠. 책이 그런 걸 해줄 수 있다면 움츠렸던 관계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는 거죠. 하지만 책의 원래 기능에는 자존감을 찾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어요.


.186-187

질문) 출판 등 어떤 '기획'이라는 것에 그런 고정관념이 따라붙잖아요. 흐름, 동향....

-저는 무심한 편인 게 흐름, 동향이 있다고는 해도 제가 읽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예요. 그냥 우리나라는 '평균'이 이끌어나가는 나라인 것 같아요. 평균 이하일 수도 있고요. 아니, 평균의 불감증에 걸려 있는 건지도요. ..... 요즘은 화장을 이렇게 하는구나.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가서 보는 영화가 있고, 보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거나 소외감마저 느끼는 드라마가 1년에 두세 개는 꼭 나오고,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에서 외롭고 허기진 사람들이 어떤 판타지를 찾으려는 모습들. 그 모든 걸 평균치의 정서와 취향들이 다 몰아주는 거예요. 그 보편의 기류 속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보이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건, '책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 책을 읽기 떄문이에요. 그게 책의 미래이자, 책의 '최선'이에요.


.193

질문) 꿈을 이루고 살고 계신가요?

-... 차마 돌아보기도 시간을 살았던 것 같은데 그게 왜 돌아보기 싫었던건지... 그런 막막함 없이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시간이란게 우리에겐 있는 거죠. 결국엔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좋았다고 진정 말할 수 있는 시간이요. 꿈은 ...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꿈을 꾸고 있다는 감각 없이 꿈 자체가 늘 나를 따라다니고 있지 않나 생각돼요. 꿈은 이루지 않아도, 이뤄지지 않아도 그걸 가지고 사는 만큼 사람을 살아 있게 하죠.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 거잖아요.


.234

질문)힘겨움이 힘겨움만으로 끝나버리기도 하잖아요.

-아무리 철갑을 두르고 무장을 해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에는 바로 '나'라는 장애요인이 있어요. 나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들, 나여서 가 닿을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금을 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질문) 작가님도 누구나처럼 그런 순간을 살아온 거죠?

-... 그래서 피를 갈아 채웠느냐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무조건 믿어보는 가운데 이런저런 답이 구해졌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아주 불가능한 삶을 살자, 라는 확신이었어요. 그 확신만이 나의 든든한 배경이었죠. 싫어하는 만큼 참다보면 나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졌어요. 싫어하는 걸 3개월만 하자. 그러면 나에게 3개월의 자유시간이 돌아올 테니... 이런 식의 패턴이 억지로 억지로 순환한 거죠.


.248-249

질문) 여행을 통해 어떤 큰 전환을 만난 적이 있었나요.

-극적인 전환은 인도에 갔을 때였어요.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정말 여행에서의 흔히 있을 법한 자잘하고도 우연한 사고처럼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엘 거의 끌려가다시피 갔는데... 그땐 불확실한 미래 떄문에 도무지 살아 있다는 게 무서웠던 시절이거든요. 하루하루 내 자신을 자연 속에 풀어 놓고 끊임없이 나는 물론 세상한테 질문 같은 걸 던지고 그러고 있었는데 눈을 가고 앉아 있는 어느 새벽, 눈물이 뚝뚝 흐르더라구요. 괜찮아, 정말 다 괜찮아..... 라는 소릴 들은 것 같았어요.

... 인도 여행을 하면서 명상을 통해 대단한 위안을 얻었기보다는 그래도 어느 한 방울 정도만큼은 '그래도 잘 살아가겠다' 같은 최초의 의지를 던져 받은 거죠. 그 여행에서 받은 어떤 충격 같은 것을 그리워하는 심리가 나를 지금도 계속해서 여행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구요. ...

.252

질문)전환이기도 했지만, 개인에겐 일종의 쇼크였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 잠시 떠났으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여행, 있어요. 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정도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면 잘 살고 있는 사람일 거란 이야기예요.

.253

질문)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게 엄청난 기억과 강도 있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잖아요. 꽃으로 피어나 물들이는 여행도 있을 테고, 그냥 흘러가는 여행도 있을 테구요.

-우리가 얼마나 동물인가를 알게 해주는 거, 그건 여행과 연애라고 생각해요. 나는 동물일 때 가슴 한가운데 어떤 문장이 지나가요. 맨 정신을 가지고 사람으로 사는 건 영 내가 아닌 것 같은 거죠. 문득 만나는 그런 상태, 동물적이면서 한편 인간적인 문장만 건질 수 있다면 여행은 성공한 거라 믿어요.

-... 도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도시는 걸어야 해요. 모든 여행의 기초가 그래야겠지만 걷지 않으면 그 도시를 오래 기억할 수 없어요.


.266-267

질문)외롭게 외로움을 끌어안기. 미치겠네요... 이병률이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늘 혼자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는데... 맞았어요. 하고 싶은 일, 언젠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요?

-외국에서 오래 살아보는 일, 하고 싶어요. 이십대에는 2년을 파리에서 산 적이 있지만 제대로 살았다는 기분이 없어서요. 어학을 조금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구요.

질문)어떤 언어를요?

-프랑스어나 중국어요. ... 인생의 중간 지점에 어느 정도 학생의 신분으로 살아보는 거, 그런 게 조금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에요. 나한테 학생으로 살았던 시간은 정말 짧았으니까요. 나중에 나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요. 정말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살았다니까! 이렇게요.

하지만 어느 곳이든 살 기회가 있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한 게, 이제 여행자로 사는 것도 좋지만 어느 한곳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다면 다른 깊은 맛 같은 게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기보다는 언어를 배우고 산책을 하면서 그 도시의 길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가는 정도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이 도시는 내가 이렇게 여길 좋아하는 걸 알긴 알까?' 정도의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는 거?

그냥 어딘가로 내던져지는 느낌으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 그런 곳이 어디인지는... 글쎄요.


.267

질문)... 오늘까지 아무런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았는데, 내일 아침 어디론가 훌쩍 떠난 여행도 있으셨나요? '갑자기'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것도 닮아 있어요. 왠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시기에 뭔가를 저지르죠. 꽃을 꺾고도 치유가 되지 않은 기분이 차를 몰게 하거나, 기차를 타게 하거나 해요.

.269

질문) 아마도 계속해서 여행을 하겠지요?

-작가는 글을 쓰러 직장에 나가지 않아요. 세상 많은 것들을 마치 구슬처럼 튼튼한 실에 꿰는 직업을 살죠. 바늘과 실을 가지고 구슬을 찾는 직업의 사람이 작가입니다. 구슬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고 색깔도 다릅니다. 그리고 구슬이 하나의 실에 꿰어졌지만 그 옆의 구슬에 영향을 받아 크기도 색도 달라질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도 그 구슬 꾸러미를 보고 '하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책 한 권을 읽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열 명 모두가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내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도 제가 주워 모은 구슬에서 실을 잘라낸 다음, 쏟아서 흩어놓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구슬을 다시 주워서 실에 꿴다면 이전과는 다른 순서와 배열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긴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지 않은 문장들을 옮겨 적으면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이병률 작가도 학생으로서 살아보고 싶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지난 1,2월 두 달 동안 내가 했던 건데, '학생'이라는 좋았던 느낌보다는 애매한 기분과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당한 경제력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 결혼하고, 애를 낳고.... 하는 그런 일련의 생애주기를 벗어나서 쌩뚱맞게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으니...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 인생에 절대 배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언어를 배우고 있다니. 이런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했다.

내가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왠지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은..." 이병률 작가의 말과 비슷하게 현재의 삶에서 방향과 답을 못 찾겠어서이다. 그렇다고 독일이 완벽한 '파라다이스'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해볼 수 있는 하나의 탈출 방법이고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워홀 준비를 하고 있다.

.82

-... 눈치만 봤던 시간들도 있었겠죠. 매순간마다 또 며칠씩 불안했던 적이 많았어요. 두려웠던 건 '나는 어떻게 살까?'하는 터질 것 같은 막막함 때문에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했을라고요. '사는 건 항상 이렇게 무서운 걸까.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이 넘으면 그때는 무섭지 않게 될까' 하고요. 그러고 보니 십대부터 삼십대까지 불안하고 동거를 했었네요.

 

서른 살이 되면, 좀 완벽하게 살 수 있을 걸로 기대했었다. 내가 바라던 직업을 얻고 경력을 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서른 살은 그다지 두려워할 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기대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앞날은 깜깜한 동굴을 걷는 것 같지만 비단 나만이 그런 막막함을 가진 것이 아니니, 너무 좌절은 말아야겠다. 이병률 작가 또한 '불안하고 동거'를 했었다니.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이 못 미덥지만, 살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사치' 스러운 감정이라고 여기고, 괜한 걱정으로 벌벌 떨 시간에 아쉬운 잠이나마 더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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