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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방랑기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 잊지못할 만남

Yildiz 2012. 2. 13. 22:22



나는 바르셀로나가 그립다

일주일이나 머물렀었는데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흐느적 흐느적 걸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서 그랬는지
마음먹으면 다 둘러볼 수 있는 명소들을 부담없이 제껴두고
발 닫는 대로 걸어다녔다.

꼭 빠듯한 계획을 세워서 모든 것을 다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 닿아야 할 곳에는 꼭 가게 될 것이라는, 자연스레 발걸음이 향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난 느긋하게 바르셀로나를 즐겼다.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거니는 멋진 젊은이들이나, 거리의 악사 연주에 맞춰서 실룩실룩 엉덩이를 흔드는 여자,
골목길을 안내해주면서 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며 환심을 사려했던 백구두를 신은 중년의 남자,
남자만 있고 달랑 나 혼자 여자인 도미토리 방에서 심난한 소리를 들으며 잠 못 이룬 밤 등

바르셀로나를 떠올리면 하나 둘씩 꺼내면서 웃어보일 수 있는, 그리워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가끔씩 내게 동반자가 되어준 여행자들의 얼굴도 하나 둘씩 떠오르니 또 좋다.
한인민박집에서 내게 모카포트로 뽑은 에스프레소를 건네줬던, 둥근 얼굴의 언니도 생각나서 이것 또한 좋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을 앞둔 날,
스페인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가기 전 날.
이제 스페인에서 만날 별다른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하루를 마감하려던 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바르셀로나 마지막 날, 스페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계획없이 무작정 바르셀로나의 길을 거닐던 날들과는 달리 오늘은 '계획적'으로 다녀야겠다 싶어서
오전에는 피카소 미술관에 갔다가 오후에는 가우디가 설계한 성파밀리아 성당에 왔다.

성당 탑까지 올라갈 생각이 아니면 굳이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한 쪽 귀로 들었다가
다른 한 쪽 귀로 흘려버려서 그랬는지.

하필 엘레베이터 운행 마감 시간 2분 전에 들어와서 휑한 성당 안을 봐야만 했다.
성당 안도 특이하지만 성당 외관에 새겨진 세밀한 부조는 
유럽 어느 성당에서도 볼 수 없는 개성있는 형상들이 많았다.

가우디의 천재성에 감탄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작품으로 인해 후세의 사람들이 덕을 보는 것이 마냥 부럽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당 매표소 박스 안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알바하는 청년도 부러웠다.



바닥에서 뒹굴던 아이.

 




뭐가 그리 짜증이 났으면...

 


 

스페인에 왔으니 투우 경기는 한번 봐야하지 않겠나 싶어 투우 경기장을 찾아 갔지만...
 

 



경기는 이미 끝났고, 경기장 반대편 횡단보도에서는 투우 경기를 반대하는 동물애호가들의 시위 열기가 지칠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바르셀로나 투우 경기장

 


실컷 하고도 부족한 스페인 여행은 다음을 위해서 미련을 남겨둔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해가 져서 어두워진 거리를 털레털레 걸어서 호스텔이 있는 람블라스 거리로 왔다.





#외국인 노동자, 아니스와의 우연한 만남

저녁을 어디 들어가서 호사스럽게 먹기엔 돈이 아쉽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자니 속이 아쉽고 해서 호스텔 근처의 거리에 있는 상점들을
스윽 지나치면서 구미에 당기는 거 없나 둘러본다.

5분이 넘도록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지 선뜻 어디를 들어가지 못하다가
이대로 길 끝까지 걸어갈 것만 같아서 눈에 보이는 작은 슈퍼에 들어왔다.

카운터에는 주인과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다.

스페인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가 아닌가 보다.
하긴, 지금 이 시간대에 일하는 스페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과자와 마실 것을 사들고 계산을 하려는데, 한 사람이 내게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그냥 길거리였으면 한번 살짝 째려주고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굳이 화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가볍게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 사람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내기라도 했나?

"중국 사람이에요?"

"아니요." 또 웃으면서 넘긴다.

눈이 큰 사내가,
'한국사람이세요?' 라고 묻는다.

대게 한국까지는 안 물어보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마운 일이다.
앞에서 들은 일본, 중국이 모두 용서가 된다.

눈이 큰 남자가 카운터에서 일하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사람 한국에서 몇 년 살다가 왔어요."

"정말요?"

그제서야 한국말로 말하는 이 사람.
이름은 아니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한국에서 7년 정도 일했다고 한다.

"11시에 일 끝나는데 같이 밥 먹을래요?"
아니스는 내가 산 간식거리를 봉지에 넣어주며 묻는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 밤이 꽤 깊어가는데 괜찮을까. 믿어도 되는 걸까?
바르셀로나를 혼자 늦게까지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 나는 잠시 두려워졌다.

이 사람이 뭔가 나쁜 꿍꿍이를 갖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눈을 바라본다.
쌍꺼풀이 진 눈에 선하게 생긴 눈동자. 그의 두 눈을 보니 별일 없일 거란 생각이 들어,

"네, 좋아요."
선뜻 초대에 응한다.



아니스가 일하는 동안 나는 카운터 옆에 앉아 시계만 멀뚱멀뚱 쳐다본다.
그러다 문득.

아니. 내가 순간 실수 한거 아닐까?
혹시....이러다 어디 몰래 잡혀가는 건 아닌가 몰라?? 불안감이 돌연 치솟아 어쩔줄 몰라했지만

그래도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눈은 그 사람의 영혼의 창이라는..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을.

순간의 바라봄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확신할 수 있었던 내 판단을 한번 믿어보자.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기도,
이따금 빠르게 흘러가 결국 11시가 되었다.

한참 살펴본 바로는,
이 가게는 인도 남자가 운영하는 상점이다.
처음에 내게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눈이 큰 사내.
이 사람이 가게 주인이고, 아니스는 직원이다. 




#

가게 문을 닫고 이들을 따라 간 곳은 인도 음식점.
아니스와 둘이 먹는 줄 알았는데, 사장이 사주는 건가 보다.
사장은 순식간에 메뉴를 시켰는데, 테이블이 비좁을 정도로 음식이 나온다.

늦은 시간의 저녁식사.

슈퍼 주인은 내가 무슨 여행을 하는지 궁금했는지 아니스에게 물어봐 달라고 했나보다.
사실 그가 직접 내게 영어로 물어봐도 되지만 아니스가 힌디어를 잘해서 그런지
굳이 영어를 쓰지 않는 것 같다.

아니스는 한국말을 거의 다 까먹었다고 하지만
7년정도 한국에서 일하고 지냈기 때문에 한국말을 대부분 잘 이해하고 제법 잘한다.
이정도면 꽤 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아니스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아니스는 힌디어로 슈퍼 주인과 이야기를 한다.
영어로 말하지 않아도 한국말로 하면 누군가 통역을 해주다니. 이런 상황, 나름 재밌는 것 같다.
영어 문장을 굳이 만들어도 되지 않는 이 편리함이란.


"아니스, 힌디어를 어떻게 잘 해요?"
"방글라데시에서 인도 드라마 많이 봐요. 드라마 많이 봐서 힌디어 알아요."


왼쪽이 아니스, 오른쪽이 인도 사람, 가게 주인.




아니스는 한글로 자기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까먹은 것 같다며 냅킨에 써본다.

'아스'라고 쓰길래 가운데 '니' 자를 빼먹었다며 알려주었다.

너무 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한게 무지 아쉬웠지만,
처음 보는 여행자에게 고향 친구 만났것 마냥 후하게 대접해준 이들에게 무척 감사하다.

아니스는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가 섭섭했던지, 잠시 같이 걸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난 밤늦게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 또 걱정이 되긴 했지만,
또 별일이 있겠나 싶어 아니스와 함께 걸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걷다보니 바르셀로나의 바다로 왔다.






#그리움...  


천천히 또박또박, 아니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외국인 노동자로서 한국에서의 삶.
이슬람교도라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데, 점심식사는 늘 흰 쌀밥과 돼지고기, 김치만 나왔다고 한다.
고단한 마음과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래줄 식사시간에 
매운 김치와 흰쌀밥만 먹었다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싶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일했던 회사 사장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스가 일을 성실히 잘하니까 출장을 보내기도 하고,
딸 결혼식때 초대하기도 하고, 가끔 보너스도 주기도 했다고.

한국은 밤늦게 돈 많이 갖고 다녀도 강도 걱정 없는데, 바르셀로나는 조심해야 한다면서
카메라는 내놓고 다니지 말고 가방 속에 숨기라고도 얘기해준다. 


바다를 바라보는 아니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머나먼 고향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7년 정도 일했으면 어느 정도 돈을 벌었을것 같은데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이 또 필요해서 고향에서 한국보다, 더 멀리 떨어진 이곳 스페인까지 온 것일까.

난 감히 묻지 못했다.


아니스에게 가족이 보고 싶지 않냐고 물으니, 지갑을 꺼내 아내 사진을 보여준다.
나보다 더 젊어보이는 아름다운 여자.
작년에 아들을 낳아서 1살짜리 아들도 고향에 함께 있단다.

한국에 다녀와서 고향에 가게를 차려서 어머니와 아내, 아들이 같이 지낸다고.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겠어요.."
"내가 전화하면 아내가 막 울어요."

아니스는 말끝을 흐린다.
지갑에 넣은 아내 사진을 물끄러니 바라보더니
어둠이 삼켜버린 도시 속을 우두커니 쳐다본다.

뭐라고 말을 붙일까 하다가
순간 아니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건
도시의 거리가 아닐 거란 생각을 해본다.

그의 눈에 펼쳐져 보이는 것은
내가 보는 것과 같은 광경이 아닌,
고향에 두고온 가족과 그의 정다운 집터일 것일지도...


아니스가 사는 집이 호스텔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친절한 그는 나를 호스텔 정문까지 바래다 주었다.

"낼 떠나기 전에 가게에 와요."
"네, 내일 갈게요."

왜 아니스는 스페인에 와야 했는지 궁금했지만
질문들만 머릿속을 나돌 뿐, 나는 끝끝내 묻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면서 깼다 잠들었다 반복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 뒤쪽이 퉁퉁 부어있다. 세상에. 또 베드버그에 물린건가?
그런데 베드버그에 물린 것치곤 팅팅 부어올랐다. 모기 10방 물린 것처럼.
게다가 몸엔 열도 난다.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인데,, 액땜하고 가는 건가.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 후,
가게에 들렀다 가라는 아니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슈퍼로 왔다.

인도 사람도, 아니스도 나를 반겨준다.
가게주인은 커피 마시겠냐며, 나를 위해 커피도 시켜준다.


가게에 온 손님이 찍어준 사진. 어째 스페인 사람이 찍어주는 사진은 좀 흔들려 있다.



처음 만난 나를 고향 친구마냥 대해준 아니스에게
떠나기 전 한국에서 사온 기념품을 하나 선물로 주었다.

이 작은 핸드폰 고리가 그의 향수병을 어찌 달래주겠나 싶지만
그래도 그에게 뭔가 추억할만한 것을 건네 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아니스는 한국에 가면 자기가 다녔던 회사에 한번 전화해달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전화번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공항으로 가기 위해 아니스와 가게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서

가게 사진을 찍으려 뒤를 돌아봤는데,
아니스가 내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2008년 7월 바르셀로나, 스페인


가끔씩 드는 생각.
인도 사람은 아직도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
아니스는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바르셀로나만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들.
내가 스페인에 다시 가기까지,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지만,

바르셀로나에 가게 되면
이곳에  다시 한번
찾아가보고 싶다.
그들의 사진을 손에 들고...
설혹, 그들이 그곳에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2008년에 쓴 여행 일기장에는
아니스가 알려준 회사 전화번호가 있다.
전화 걸어봐, 말어?
멈칫거리다 보니 벌써,
3년이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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