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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방랑기

[라오스] 여행자의 권태, 각성 그리고 다짐

Yildiz 2012. 1. 28. 01:09




#.


방비엥을 거쳐 루앙프라방 - 라오스 북부로 올라오는 여행자들은
대개 태국 북부를 거쳐 방콕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 에너지, 혹은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나는,
도무지 낯선 길을 혼자서 가고 싶지 않았다.
방비엥을 떠나 외톨이가 된 이후로 줄곧 새로운 광경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새로운 길 말고 내게는 조금 익숙한 길을 택해 방콕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2시간을 꼬박 걸려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까지 가기. 
라오스 15일 무비자 기한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선은 국경 근처에 가야 한다.

무척 길고 지루한 여행이 될 것이 자명하지만 어쩌겠나.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하나 샀다.  

그러나, 이내 섣부른 내 결정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되었다. 
비엔티엔으로 가는 야간버스표를 사면 좋았을텐데!
숙박비도 줄일 수 있고 말이다.

내일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버스를 제때 탈 수 있을까? 
이 침대에 베드버그가 있을까? 걱정하며
루앙프라방의 어느 게스트하우스 지하방에서 잠이 들었지만
다행이 새벽에 잘 일어나고, 똑똑 기사가 날 잊지 않고 픽업하러 왔고,
짐도 잘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누가 12시간이나 걸려 비엔티엔에 갈까 싶었지만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고,
뒤로 잘 젖혀지지 않는 버스 의자에 기대어 긴 여정에 몸을 실었다.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까지 가는 길은 꽤 험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산길을 가는 것과 비슷한데,
버스가 커브를 도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찔하다.

오르막길을 가다 창밖을 보니 사고가 났었는지 도로 밖으로 밀려난 차가
여전히 나무가지 사이에 걸려 있다.

어떻게 보면 이 길을 밤에 지나가는 것보다
낮에 지나가는 게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커브와 급경사면.
행여 사고라도 일어날까봐 신경이 곧두섰던 나지만
순간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한 장면에 눈을 껌뻑거리기 시작한다.


 



구름인가, 안개인가?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가늠을 못 하겠다...

지표면과 가까이 있으면 안개이고,
지표면과 떨어져 있으면 구름이니까...
이건 구름이라고 봐야하나?





라오스 여행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다가
루앙프라방과 방비엥 가는 사이의 길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에 운전기사에게 잠시 세워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라는, 누군가의 글을 본 게 생각난다.





때가 군데군데 묻어있는 유리창을 경계로 둔 채,
잠시 쉬어가고 싶은 여행자의 욕망을 알리가 없는 버스는 
꾸준히 달린다.





그리고...
여러번 셔터를 누르는 손놀림에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광경을 담게 됐으니....

높은 산 중에 살고 있는 현지인의 마당.
달리는 버스안에서 찍은 사진 치고는 정말 운 좋게 찍었고,
디카의 액정을 통해 이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난 그동안 관광지에서 보아온 라오스 사람들의 삶이 전부인 것 마냥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생활하듯 편리하게 인터넷을 찾아 쓰고, 그런 편리함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듯이
라오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단순한 관광을 하고 있었구나.



해가 지고 저녁이 내려앉는 비엔티엔의 밤 거리.



숙소 예약 없이 비엔티엔에 온 까닭에 싼 곳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처음 비엔티엔에 왔을 때 머물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잠깐 들렸다. 그 친구가 있음 잠깐 이야기라도 할까 했는데
리셉션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 그 친구, 잠깐 어디 갔다고 한다.

"이거 여기서 물린 거에요."

리셉션의 남자에게 베드버그가 훑고 간 내 팔뚝을 보여주니
멋쩍어하며 웃는다.

보상해달라고 보여준 건 아니여서 난 그냥, 씨익 웃는다.





##.


싼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하룻밤에 2달러 도미토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좋게 발견했다.
그리 깔끔한 곳이 아니라서 또 베드버그에 물릴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2달러. 땡큐 베리감사다. 정말.


방콕에서 한인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지내본 것 이외에
이렇게 다양한 외국인이 있는 도미토리 방은 터키 이후로 처음이다.

집시풍의 이탈리아 여행자
그리고 중년의 일본인 여행자.
그외 다른 여행객들도 머무는 것 같은데 자리에 없어서 모르겠다.

일본인 여행자는 일본에서 퇴직하고 라오스에 여행 와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거라는데
이곳이 숙박비가 무척 싸서 좋단다.

이 일본 아저씨의 진가는 다음날 아침에 알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집 딸 대신 도미토리 방을 구석구석 걸레질하는 아저씨.
딸은 좋다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놀고 있다.
아이가 대충 청소하는게 못 미더웠던지, 당신이 나서서 청소를 한다. 
이 도미토리 방은 라오스에 있을 뿐이지, 아저씨의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당신의 침대가 있는 구역도 아닌데, 도미토리방 전체를 꼼꼼히, 정말 열심히 청소하신다.





###.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내 침대 아랫층을 쓰는 여행자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했다.

영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영국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여행해왔단다. 8..개월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가 급한 약속이 있어서 대화를 서둘러 마쳤다.
엄청나게 아쉽다.

자전거로 여행하고 있다는 말에 내가 무척 놀라워하자
그가 답한 말이 내 머릿속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면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어."


어제 아침에 찍은 사진이 생각난다...

산봉우리 사이로 탈지면처럼 깔려있던 구름 사진 말고.

고원지대에 사는 라오스 가정집 앞마당 사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1초만에 찍은, 
버스 안에서 운 좋게 잘 찍었다고 좋아한 사진 말이다.

눈 한번 깜빡거림으로 지나친 그 광경에
자전거를 끌고 막 앞마당을 지나가는 영국인 여행자를 등장 시켜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며,
지친 나그네에게 정답게 물 한사발 건네주며
웃어주는,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의 존재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무언의 대화를 하는 그런.

그런 시간들은 내 라오스 여행에는 없었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고 있는 영국 여행자가 만나온 수많은 인연들과
인연들 사이에 오갔을 무언가를 막연히 상상하면서


나도 다음에 라오스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여행 말고.
자전거 여행을 해야겠다며 다짐해본다.


느리게 가는 바퀴에 몸을 싣고 여행하는 것이
빠르게 가는 바퀴에 몸을 싣는 것보다 몸이 고되고 수고롭겠지만

사방을 자유로이 여유롭게 둘러보며
빠른 속도로 지나가다가는 놓치기 쉬운 존재들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조금은 속터지겠지만
느린 여행.


"자전거로 여행을 하면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어."

영국 여행자가 말한 '다른' 것이란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버려 언제부턴가 잊혀져버린
원래 우리의 원초적인 속도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한 걸음.
그리고 만남.


-2009년 1월, 라오스에서



 

p.s)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다리에 쥐가 날 것 같다.ㅜㅠ
루앙프라방과 방비엥 사이의 산골짜기는... 어떻게 지나갈건데?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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