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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본문

소소한 일상/영화수다

[태풍이 지나가고]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Yildiz 2016. 8. 18. 01:21


영화 [걸어도 걸어도] 를 보고 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마침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곳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3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한편도 아니고 3편이라니. 그중에는 최근 개봉된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고 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번 영화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가족이야기를 찍지 않겠다고 한다. 2008년 작인 [걸어도 걸어도] 이후에, 감독이 차마 그 영화에 담지 못했던 생각과 이야기들을 [태풍이 지나가고]에 최대한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2주전에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난 후, 삶과 죽음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친구에게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봐야할텐데." 라며 능청스런(?)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평소의 대화 답지 않은 글에 남자친구는 "불안하게 왜 그래..." 이런 식으로 답장을 보냈었는데,

남자친구와 내가 메신저를 통해 했던 비슷한 대화가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로 나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고 느껴서일까...  '늙었으니까', '늙게 되면' 죽는 게 아니라, '언제든,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삶의 진실에 대해 더 담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 지금 사는 순간밖에 나는 모른다는 생각으로 더 즐기며 살고 싶게 만들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자관계로 나온 두 사람.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 심지어 아베 히로시는 극중 이름이 여기서도 '료타' 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실제로 어렷을 적에 살았던 아파트. 자신의 어렷을 적 살았던 공간과 부모님과의 추억을 잘 반영한 영화 같았다.

이번 영화에서 아베 히로시는 '료타'라는 똑같은 이름의 '아들' 역할이지만, 하는 행동이 영, 뭔가 어긋난 기분을 들게 해줬다. 아들에게 비싼 야구 글러브를 사주고 싶어하면서도, 도박에 돈을 다 써버리고, 이혼한 아내를 미행하면서 아내에게 새로 생긴 남자친구와 둘이 '잤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연립주택에서 지내는 어머니 집에 찾아가서는, 돈 될만한게 있나 여기저기 뒤지는 건 그가 그 집의 '아들'이니까 허용될 수 있는 나쁜 습관이었던 것 같다. 그는 어렷을 적에 꿈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스로에게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나왔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나비'는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으로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의 전작과 비슷한 흐름이 남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태풍이 지나가도]는 또 다른 주제를 담고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갈등의 최고조 부분은 아무래도 '태풍'이 온 날 밤의 부분이다. 료타는 아들 '싱고' 와 함께 오후의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어머니의 집으로 온다. 아들을 데릴러온 전 부인은 태풍 때문에 집에 가기가 애매해지고, 결국엔 태풍이 그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한다.

료타는 자신이 어렷을 적에 태풍이 온 날 밤에 아버지와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서 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생각났고, 싱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들은 흔쾌히 료타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료타의 엄마도 함께 놀이터로 와서 '예전에는' 가족이었던 세 사람이 오롯이 모였다. 

아들이 자판기에 따듯한 음료를 뽑으러 갔을 때, 아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가만히 바라보던 두 사람. 아내에 대한 질투인지, 미련인지, 아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재결합을 바라며 안절부절해하던 '료타'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딘가 평안해진 미소를 짓고 있는 '료타'가 보였다. 전 부인과 료타가 나누는 대화속에서, 서로에 대한 미련과 해묵은 감정들을 털어내고, 혼란스런 상황들이 갈무리되어가는 듯 보였다.


“모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 시나리오의 첫 장에 있는 글이라고 한다. 영화 속 대사 중에도 '어른'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한번쯤, 그럴듯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있다면 꿈꿔왔던 대로 살고 있을 거라며 막연히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꿈과 멀어지는 삶을 살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던 어른이 되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 삶이란 건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 다시 시작하기 어려워 보이는 삶일지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내자신의 삶에 대한 조그마한 긍정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리 늦은 건 아닐 것이다. 

고단할 것만 같았던, 귀찮게만 느껴졌던, 혹은 어려운 것으로만 느껴졌던 힘든 시간들.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는 오히려 날씨가 화창하고, 세상이 깨끗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움과 화창함을 겪고 또 겪는게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원하던 어른의 모습대로 살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지금 내가 사는 하루가 있지 않느냐고.

과거의 아쉬움과 미련은 그대로 뒤로 두고, 우선 걸으면 되지 않겠냐고.

감독은 따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걸어도 걸어도]에서 나왔던 노래가 인상 깊었는데,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역시, 좋은 노래가 엔딩 크레딧으로 함께 했다. 

일본 가수 하나레구미Hanaregumi의 '심호흡' 이란 노래다. 

지난 어제는 안녕하고, 다가운 미래를 긍정하는,, 그런 가사인데. 일본어를 몰라서 해석을 못하겠다. 일본어를 좀 알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해준 건, 이번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처음이다. 명탐정 코난을 봐도, 원피스를 보더라도 일본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p.s. 맥스무비 기자와 키키키린의 서면 인터뷰

http://news.maxmovie.com/247818

영화는 되고 싶은 어른이 되었나’ ‘원하던 삶을 살고 있나’ 같은 질문을 거듭 던집니다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내놓겠습니까?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닥치는 대로 막 부딪혀 온 인생입니다. 그런 제가 처음으로 스스로 어른이 됐다고 자각을 한 것은, 암 선고를 받았을 때예요. 암이라고 하는 나만의 책임을, 나 혼자서 등에 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누구든 인생의 어딘가에서, 꿈이나 이상을 포기할 때가 옵니다. 그렇다 해도 ‘아~차가 맛있구나’, ‘아~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구나’ 하고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떤 현실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출처: 맥스무비 기사 <태풍이 지나가고> 키키 키린 | 엄마라는 사람 중에서 

영화에서도 감동이었는데, 인터뷰 내용또한 너무 좋다. 귀찮게 느껴지더라도, [태풍이 지나가도] 영화도 보고, 배우 키키키린 인터뷰 기사도 읽어보시기를.

이번 여름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알게 되서 참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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