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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마음으로 이해하기

꽃사진이 없는 꽃 이야기

Yildiz 2012. 7. 8. 21:48

 

 

새로운 해가 되고, 새로운 계절이 성큼 다가올 무렵

기대되는 손님들이 있다.

바로 제철이 되야 피는 꽃님들이다.

 

냉동고의 강풍처럼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겨낸 후 찾아오는 봄,

작지만 여럿이 모여 화사한 벚꽃은 진정한 봄을 실감나게 한다.

 

간간히 봄내음을 실어 오는 바람을 맞으며

흩날리는 벚꽃잎을 볼때면

내가 대학생때 자주 찾곤 했던 작은 동산이 그리워진다.

 

그곳에 있는 벚꽃나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언제 꽃잎들이 다 질까? 꽃이 다 지기 전에 한번 다녀올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곳에서 찍었던 벚꽃 사진을 다시 한번 들춰보기도 한다.

 

 

여름의 초읽기가 시작될 무렵,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능소화도 반가운 손님 중 한 분이시다.

 

2007년에 한달 과외치를 모두 투자해 생애 첫 카메라를 장만했었다.

그해 여름에 찍었던 능소화 사진이 잘 나와서 무척 기분이 좋았었다.

 

그 후에도 여름에 능소화를 보면 나는 내 사진과 함께 능소화를 찍었던 장소를 생각했고,

가끔 가던 발길을 일부러 돌려 그곳을 다시 찾아가기도 했었다.

 

작년에는 서초동의 어느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능소화를 찍었었는데

사진에 찍힌 능소화는 그때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가끔 마음속으로도 꺼내보는 사진 중에 하나다.

 

 

2주전, 합정역 근처에서 하는 글쓰기 강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이 날은 정말 오랜만의 가뭄 끝에 단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어느 까페의 담장을 지날 때였다.

넝쿨식물이라 담장을 타고 올라 아래로 뻗은 가지 끝에 능소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은은한 조명과

주룩주룩 내리는 빗방울이 능소화를 정말 아름답게 비춰주었다.

 

정말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었는데, 내겐 폴더폰에 내장된 카메라 밖에 없었다.

 

귀찮다는 핑계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내가 원망스럽고,

스마트폰이 아닌 내 폰도 무척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잠시 그곳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음주에는 꼭 사진을 찍겠노라

다짐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놓친 순간을 아까워하며, 이번주 금요일에 다시 그곳을 찾게 되면

어떤 구도로 사진을 찍을까? 필카와 디카를 모두 가져가서 사진을 찍어볼까?

 

홀로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며 기다렸건만.

 

 

목요일에 합정역에 들를 일이 있어서 늦은 밤 그곳을 찾아갔으나,

신나게 내린 비님 덕분에 능소화는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있었고,

카페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조명이 꺼져있어서 자세히 주위를 살펴볼 순 없었지만

뭔가 저번주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다음날, 금요일.

 

담장 아래 떨어진 능소화라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그 까페 근처로 왔다.

 

그런데 가게 직원들이 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능소화 가지를 정돈하고 있다.

 

바닥에는 어제 저녁에 있던 능소화의 흔적마저 없다.

 

아. 순간은 정말 딱, 그 한순간 뿐이구나.

가만히, 있는 그대로,

내가 다시 찾아갈때까지 꼼짝말고

있어달라고 부탁해봤자

변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구나.

 

아쉬워하면서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영 궁금할 것 같아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왜 이 가지를 자르는 거에요?"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두 직원은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한 직원이 말하였다.

 

"이 가지들이 조명을 가려서요.."

 

"아... 그래요?

 

..... 여기 꽃 되게 예뻤는데.."

 

 

아쉬움을 짧게 내뱉고는 가던 길을 갔다. 

 

 

 

 

 

 

글쓰기 강좌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다시 그 까페 담장 앞에 멈춰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능소화 가지들. 그리고 정말 깨끗한 담장 옆 길.

이것만 가지고는 저번주에 봤던 그 아름다운 장면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까페 주인에게는 능소화가 그리 멋 없고 줄기는 죽죽 자라서 조명을 가리는

불필요한 존재였던걸까.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꽃이기도 하구나.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던 순간을 놓친 것에 대한 씁쓸함과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자기 집 옆에 있지만 알아채지 못한 채

심지어 그것을 잘라내 버리는 안타까움 틈속으로

 

그래도 내년을 기대해보지 않겠냐는 희망이 생긴다.

 

내년 6월,

능소화가 필 무렵을 지금부터 기다려본다.

 

기다림이 삶의 일부라고 하지 않는가.

기다릴 수 있다.

내가 놓쳤던 순간에 대한 후회를 만회하려면,

그까이껏,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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