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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로 일하는 삶, 흙으로 돌아가는 삶 본문

소소한 일상/수다쟁이

뼈로 일하는 삶, 흙으로 돌아가는 삶

Yildiz 2010. 10. 18. 23:33


오랜만에 본 손주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지, 외할머니가 이것저것 여쭤보시는데
나는 대답하건 말건 시큰둥. 빨리 다 읽어내리고 싶은 책만 바라본다.

"할머니, 저 말 많이 하는 거 싫어요.
 좀 쉬고 싶어요. "

이렇게 막 말해놓고도, 할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한다.

사실, 요즘 말하기가 귀찮을때가 있다. 그냥 있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잠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더라도, 어느 순간은 말하는 게 조금 힘들어진다. 
목에 무리가 간 걸 은근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일 때문에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힘들다 하니, 할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니는 목으로 일하는 갑다. 니네 할아버지랑 삼촌은 뼈로 일해와서 이젠 삭신이 다 쑤신단다."


아아-
뼈로 일하는 삶이라...

할머니의 비유가 너무도 그럴듯하여 잠시 읽던 책을 멈추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이후로 발길이 뜸해진 고향에 올때마다 항상 다르게 느끼는 건
조금씩 변하는 길거리와 가게의 간판들,
그리고
어렸을 적엔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어른들의 어깨는 점점 줄어들고
당신들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점점 늘어나고...
검었던 머리카락들 틈새로 더해지는 흰머리에 눈이 더 갈 때... 
나는 말없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당신들이 뼈로 일해서 시간이 지나 예전 같지 않다는 말씀. 왠지 서글퍼진다.
하지만 당신들이 뼈로 일한 것들이 어디로 갔나 캐물어보면 그게 다 자식들을 업고 달래며 키우는데 쓰이지 않았겠는가.

일 때문에 내 목이 다 망가진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걸 다시 곱씹어본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게 점점 망가지는 게 당연하다.
일을 그저 공짜로 할 순 없는 거고.
나도 뼈로 일해서(혹은 목으로 일해서) 내 가진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다.
그저 고생하는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키워온 것처럼.
나도 내가 받은 만큼,
남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몇 장 더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사람은 뼈와 살로 되어 있으니, 뼈로는 일을 하고, 살로는 정을 나누는 것인가 싶습디다...."
-p.243  혼불 vol.2


어른 말씀 틀린게 하나 없다고,
방금 전에 할머니가 말씀하신 걸 책에서 발견하다니. 희한한 우연이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나를 길러주고 업어주고
배고프다 울면 먹여주고 따뜻한 옷을 입혀준 부모님이나
가족들. 이웃들.
세상에 나고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과 때를 묻히고
그들의 뼈에 얹혀 살아왔다.

어느정도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이젠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때다.

뼈로 일하는 삶.
타고난 공짜주의는 버리고
자신을 내주어야
나도 뭔가를 얻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자꾸 내주다보면
젊은날 장성했던 뼈는
어느새 작아져서
흙,
흙으로 돌아가겠지...

흙으로 돌아가는 삶.
뼈가 다 스스러지는 생의 마지막 날.
뼈는 고운 가루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소를 들이마시고,
얼마나 많은 물을 마셨으며,
얼마나 많은 쌀과 고기와 야채를 먹어왔을까.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고마운 사람들의 존재뿐 아니라,
다른 환경들도 생각하다보니,
헤아릴게 너무도 많다.

헤아릴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의 깊이며,
무수히 헤아릴 지구상의 소중한 것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각 개인의 존재들이
그 자체가 기적이자 위대함을 증명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지런히, 열심히 살기에도 부족할 수 있는 시간인데,
투정일랑 이제 적당히 해야겠다.
살아있는 시간 만큼은,
행복할 필요가 있다.


"... 내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존재하지요. 내가 있기 때문에 조약돌과 저 구름이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요?
하나의 먼지가 다른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지요.
먼지가 없다면 우주도 없고, 당신과 나도 없을 거예요. "

- p.107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by 틱낫한



(저번달 추석 지나고 쓴 글인데, 마침 또 좋은 책을 손에 쥐고 있어
더불어 생각할 것이 많아 이제야 겨우 수습해서 포스팅합니다.. =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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