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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자, 청춘!

[까미노 이야기 4] 순례 3일째, 세 사람 이야기 본문

까미노, 그 길을 걷다

[까미노 이야기 4] 순례 3일째, 세 사람 이야기

Yildiz 2009. 4. 15. 14:38
 사는 곳은 달라도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 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새벽 다섯시 반. 어이쿠! 근육은 당기고, 어깨는 아프고.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구나...  어제 죨드가 마르코스에게만 함께 걷자고 한 것을, 마르코스가 내게도 아침에 함께 출발할 것인지 물어봤다. 당연히 yes!! 이랬는데... 장성한 두 남자를 따라가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게다가 이른 아침이라 사방이 어둡다. 어제 내린 비로 땅이 젖어있어 미끄럽고, 벌써부터 바지에 진흙이 묻는다. 내가 커다란 물 웅덩이를 지날 때 머뭇거리자, 손을 내밀어주는 젠틀한 마르코스! ;)

시간에 따라 차츰 떠오르는 아침 해는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세상의 모든 색깔을 드러나게 해주는 해.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걸어서 그때그때 순간들을 담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카메라를 배낭에만 모셔놓고 이런 걸 제때 못 찍는걸까. 그럼 안 가지고 다니는 거나 똑같지." 라는 죨드의 말을 듣고는 찔끔. '이거 나보고 하는 소리군.'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나도 죨드처럼 카메라를 목에 매고 걷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자식이 두명 있단다. 내가 대학교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한다고 하자, 교육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의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에 대해 토로하고, 초등학생들은 학원에 얽매여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이 없다고 했다. 마르코스는 브라질의 공립학교에서 질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가 없어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낸다고 한다. 비록 비용 부담이 크지만 말이다.

2시간을 내리 걷는 건 아직 해보지 않은 건데,,, 찍소리 않고 묵묵히 따라 걸었다. 팜플로냐로 들어서서 마르코스는 바에 들러서 아침을 먹겠다고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정말 쉬고 싶었다. 죨드는 오늘 40km 를 걸을 거라,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보통 순례자가 이틀 걷는 코스를 하루 걸으니,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죨드를 못 만날 것 같다. (안녕, 죨드! 부엔 까미노!!) 바에서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아직 남아있는 빵조각을 먹고, 화장실을 이용했다. (정말 시원했다. 히히히♪)

이제 다시 고고싱!

마르코스는 브라질에서 팜플로냐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버스를 타고 론세스바예스로 이동,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순례길을 걸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나를 못 본 거 같다고하자, 나의 얘기를 솔직하게 해주었다. 택시를 타고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이동했다고 얘기하는 건, 온전히 발로만 걷겠다는 내 순례의 철칙에 위배되는 거라, 마음이 좋지 않다. 다음에 다시 까미노를 걷게 된다면 당당하게 피레네 산을 넘으리!

잘 못 알고 걸었던 그 산책로^^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 중에서는 팜플로냐가 큰 도시다. 산 길만 지나다니다 도시에 오니깐 꼭 길 잃어버리게 쉽게 생겼다.
마르코스가 백화점에서 살 게 있다고 해서  혼자 가다가 길 헤매기 싫어서 그를 따라 갔다.
등산복에 큰 배낭, 그리고 진흙으로 더렵혀진 바지와 신발이 유난히 튀었던 우리.
마르코스는 등산복 매장에서 바지 끝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는 토시를 샀다.

이미 이 도시를 둘러본 마르코스가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어디서 알았는지, 대학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 가자고 해서 나바라 대학에 가 크리덴시알에 스탬프를 찍었다. 팜플로냐에서 묵는 대신 팜플로냐를 통과했다는 기념비와 같은 스탬프를 받고 기분이 좋았다. 방명록에 ‘코리아에서 온 경은’ 이라고 적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고고~

마르코스와 걷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갈림길에서 어느쪽으로 갈까 하다가, 바닥에 노란색 화살표가 있는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걸으면서 마르코스가 하는 말이, 이 방향은 우리가 가려는 방향의 반대편이라는 것. 게다가 순례자로 보이는 무리들이 반대쪽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바닥에 화살표가 꾸준히 표시되어 있는 건 뭘까.
그렇게 30분 정도 걸었을까. 마르코스는 어떤 할아버지께 길을 물었고,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은 것이다. 에고고. 김 빠지는 소리. 투덜대는 마르코스. 힘들어 죽겠는데 묵묵히 마르코스 뒤를 밟는 나. 그리고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계속 길을 안내해주시는 할아버지.

현지인 할아버지께 길을 물어보다 밤새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다리를 못 건넜당

밤새 내린 비로 다리를 못 건너고 대신에 산책로를 따라 다른 길로 걷게 되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들과 풀들로 정말 아름다운 길이지만, 힘들다... 쉬고 싶은데 마르코스는 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 배낭 좀 내려놓고 싶다!!

 

산책하기 참 좋은 이 곳! 팜플로냐의 거리

이 곳이 바로! 산 페르민 축제를 시작하는 투우장 산 페르민 장면을 표현한 조각들.

Hey, Marcos~!


7월에 이 곳에 와서 산 페르민 축제를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것 같다. ㅠ_ ㅠ;

 


마르코스는 정말 정말 정말 잘 걷는다!! 저 여유있는 표정을 보라. ㅎㅎ

그나저나, 배낭 무게를 더 줄일 순 없을까? 배낭이 나를 점점 짓누른다... 헥헥. 죽겠다.


한번 둘러볼래? 마르코스의 말에 No, no, no ~~ 정말 반가웠던 하얀색 표지판! ↑Cizur Menor

 

일말의 인내심과 체력 모두 바닥을 드러낼 무렵, 도대체 Cizur Menor 는 어딨는거야!!
목을 길~게 내빼며 마을을 찾아보지만 지붕조차 보이지 않아 희망을 잃어갈 무렵,
반갑게도, 이정표를 발견했다.
조금만 힘내서 걸으면 돼. 아자아자!!
그렇게 겨우 도착한 마을, Cizur Menor 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아기자기한 예쁜 집들과 정리되어 있는 도로. 아직 알베르게가 여기는 시간이 아니라서, 길가에 앉아 비스켓을 먹으며 쉬었다.
스페인 형제 순례자들을 만나 마르코스는 대화를 나누고, 나는 짐을 맡겨 놓고 가까운 성당으로 올라왔다.

Cizur Menor 의 조그마한 성당 계단에 올라 바라본 Cizur Menor

어느덧 날씨가 개어 푸르른 색깔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걷는 내내 흐렸었구나.
맑은 날씨에 더불어 내 기분도 좋다! =)

내일은 저 산을 넘어야 해요! 성당 뒷편에서

 

이윽고 알베르게 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 순례자들이 차례로 줄을 섰다. 나와 마르코스는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으휴. 침대를 배정 받을 때, 이 곳 주인. 좀 남달랐다.
"젊은 사람은 윗 층, 나이든 분들은 침대 아래층을 이용하세요!" 단호하게 말하는 어투란.

어제 죨드의 조언대로 재빠른 동작으로 샤워를 하러 갔던 것처럼, 오늘도 순서가 밀리기 전에 제일 먼저 샤워장에 들어간다. 빨래도 동시에 하고, 뚝딱 해치워서 나오는데, 그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물걸레를 가리키며 바닥을 닦으란다. 아- 이런 에티켓이 있었군!
다음 차례인 사람을 위해 자기가 바닥에 흘린 물기를 닦아 주는 것! 네, 잘 알겠습니다! =)

빨래를 널고 알베르게를 한 바퀴 돌아봤다. 예쁜 정원과 가운데 조그마한 분수대도 있고, 별장 같은 편안한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곳곳에 순례자들이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한다.  

냄새나는 신발 햇볕에 말리기!

마르코스에게 이곳엔 세탁기는 없고 탈수기만 있다고 하자, "이런 일은 내 일이 아니야" 라며 투덜거린다. 투덜투덜. 하지만 어쩌겠나. 결국은 자신이 손빨래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마르코스에게, "자, 이렇게 빨래 하는 거야," 하면서 알려줬다. 그런 마르코스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줬다. (친구들에게 자랑하려나? ㅋㅋ)

 

호주에서 온 할아버지, 마르코스

해야 할 일들을 일찍 마치니, 저녁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어느새 빨래를 마친 마르코스는 어떤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눈다. 알고보니, 이 할아버지는 호주에서 오셨는데, 72세란다. 오... 까미노 길을 너무도 걷고 싶어서 오셨단다. 예의바른 마르코스는 할아버지께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친절히 말을 건넨다. 난 할아버지의 발음을 잘 못 알아듣겠는데, 마르코스는 차분히 열심히 듣는다. 깡마른 몸에 살점도 별로 없으신데, 큰 배낭을 걷고 까미노를 걷겠다니... 이 분 참 대단하시다.










어제 라라소냐에서 뵈었던 한국인 부부님들도 보았다.
정원에 핀 꽃들을 카메라에 담고,
마르코스는 추천받은 식당의 위치를 알아내어 함께 예약을 하러 갔다 왔다.
다시 온 알베르게에서 노라를 발견했다!
노라가 어제 저녁 식사를 못 한게 생각나서, 오늘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다.
"저녁에 함께 식사하지 않을래?"
"Yes!!" 밝은 웃음으로 대답하는 노라.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인 부부님께서 리셉션에 일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주인 아주머니와 한국인 순례자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주인은 이들의 숙박 요청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혹시 모를, 곧 도착할 순례자를 위해서 침대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생장으로 거꾸로 길을 걷는 이 순례자들은 다른 마을에서 묵으란다. 이 사람들도 힘들게 이 곳까지 왔을텐데, 반대방향으로 걸어왔어도 순례자인데, 숙박거부라니, 진빠지는 소리다. 하지만 완고한 이 주인을 당할 사람 누가 있겠나. 결국은 퇴짜맞고 다시 길을 가는 한국인 순례자들. 참 안타깝다. 근데 얼마후에, 정~말 지쳐보이는 어느 중년 커플이 들어온다. 이 시간까지 힘겹게 걸어왔는데, 이들이 묵을 자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들에겐 남은 두 침대가 있다는게 운이 좋았지만, 아까 퇴짜 맞은 한국사람들은 뭐지. 음... 아이러니 하다.

마르코스, 나, 노라는 저녁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미 온 순례자들에 의해 레스토랑은 북적북적. 알고보니 노라는 채식주의자였다. 두번째 메뉴는 모두 육류나 생선을 이용한 음식 밖에 없어서 노라는 첫번째 메뉴에서 두 번 골랐다.

푸짐한 샐러드에 만족해하는 노라


노라와 마르코스는 처음 만나는 거라, 서로 궁금한 걸 묻다가, 노라가 대뜸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얘기한다. 만난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픔을 얘기한다는 게 쉽지 않을텐데. 노라의 솔직한 발언과 예리한 질문은 서로의 얘기 또한 솔직하게 끄집어내게 했다.

나도 보통 잘 하지 않는 이야기를 그들 앞에 당당하게 얘기했다. 듣고보니, 우리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 내 마음도 동했으니까.
서로 사는 곳은 다르지만 비슷한 사정을 가진 이들이 우연히 함께 이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있다니.
꽤 근사한 만남이다.
그런 우리들을 위하여 잔을 부딪친다.

마르코스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므로, 마르코스의 번역의 도움으로 시험삼아 시킨 메뉴.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닌데!! 이걸 먹을 수는 있는 걸까. 밥이 먹고 싶어서 시켰는데, Negro(검은색) 가 듬뿍 이렇게 밥 위에 시꺼멓게 놓여있을수가.
이걸 어떡하냐며 당황해하니 둘다 즐거워한다. 그래도 이왕 시킨거니 맛은 한번 봐야겠지.

오징어 먹물 밥. 먹고보니 맛은 최고!!

먹다보니, 어라, 요거 먹을만 하네! 신나게 먹기 시작한다. 마르코스와 노라는 의외라며 놀란다.
(못 먹겠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때는 언제고... ㅋㅋ)
최악의 메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너무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 (negro 밖에 몰라서 다른 곳에서 똑같은 메뉴를 찾는데 실패. 스페인 여행하면서 두고두고 생각나던 음식이었다. 흑...)
디저트까지 뚝딱 해치우고 알베르게로 향했다.

노라 선그라스를 끼고~ 마르코스는 나의 강요에 의해서 ㅋㅋ


"오, 저기 봐!
무지개가 떴어."

구름 사이에 수줍게 내비치는 무지개.
노라는 아이처럼 좋아 한다.
"무지개를 보다니! 행운이야, 그렇지 않아?"


사람이 주는 감동, 자연이 주는 감동이 하나가 되어 마음이 평안해진다.
친구들과 나. 앞으로도 이렇게 활짝 웃는 날이 많기를.
조그마한 소망 하나 빌어본다.

Larasoña - Cizur Menor = 20.7km
숙소 7유로, 저녁 9.5유로, 쿠키 0.9유로, 빨래 1유로, 커피 1.1유로 = 19.5 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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